I. 강해 설교집/창세기 강해

창세기-22-드러난 것과 감추인 것-2

lampchurch 2025. 4. 18. 19:58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3 16절부터 21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이니라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이니라하시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멘.

 

타락 이후 하나님의

저희는 지금 창세기를 처음부터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고 3 앞부분에 드디어 인간의 타락의 내용이 시작되고, 이어진 3 15절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판결의 현장에 사탄을 상징하는 뱀과 여인인 하와, 그리고 남자인 아담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비밀: 그리스도, 영광의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우리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배웠고, 그와 동시에 우리를 위하여 여인의 후손, 그리스도를 심판 속에 감추어 놓으셨음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는 이러한 비밀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1 26절부터 27절까지 말씀입니다. “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 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영광의 소망이니라.”. 바울도 말씀을 통해 감추어졌던 여인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려 줍니다. 판결은 선언이 있은 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후손을 통해 계속됩니다.

 

복이 고통으로: 죄의

여러분, 앞에서 살펴본 내용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명령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주셨나요? , 바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육과 번성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입니다. , 우리가 지상 명령, 혹은 문화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이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하신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리 인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복은 이제 인간들에게는 고통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있습니다.

 

여자에게 임한 첫째 결과: 해산의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출산이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여인은 이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당하게 것이죠. 자녀는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하나이지만, 이제는 자녀를 낳기 위해 아주 고통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 출산의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녀를 키우는 모든 일들이 이상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본문이 단지 산모의 진통이나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여인이 아이를 낳을 고통은 아주 엄청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어딘지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것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죄로 인해 우리가 지금 겪어야 하는 어마어마한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에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출산의 고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 지를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 있는 것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을 낳고 아이는 다시 장성하여 다른 생명을 낳지만, 새로운 생명들도 결국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인간에게는 참으로 허무한 일이 아닐 없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 사실이 아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30살을 살고 죽었더라.” 패턴이 모든 아담의 족보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누가 년을 살다가 자녀를 낳았고, 살을 살다가 결국은 죽었더라. ‘낳았다, 살았다, 죽었다.’ 이것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창세기에서 보여주는, 우리 인생이 임신과 출산을 통해서 생산할 있는 어두운 인간의 미래 입니다.

 

출산의 고통 너머 감추인 소망 - 딤전 2

그런데 우리가 희망을 가질 있는 것은 이렇게 드러난 어두운 이면에는 감출 없는 빛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빛에 대한 말씀을 신약 성경 디모데 전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디모데 전서 2 13절에서 14절까지 입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후이며, 이는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이것이 오늘 창세기의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있지요? 그럼 계속해서 1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 서의 구절을 상당히 이해하기 난해한 말씀입니다.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말씀이 바로그의 해산하므로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구절입니다. 이를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모든 여성들이 자녀만 낳게 되면 자동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쉽잖아요. 물론 아이를 낳는 일이 쉬운 일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절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구절의해산함으로라는 번역은 사실은해산을 통해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보다 원문의 의미를 보여줄 있습니다.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인 창세기 3장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해산을 통한 고통이 더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디모데 내용에 따르면 오히려 해산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 그러면 구약과 신약 성경의 구절을 연결시켜 보면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 해산을 통해 인간은 자손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바로 사람이 자손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손은 바로 여인의 후손을 가리킨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있게 되겠지요. 그리고 여인의 후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디모데 표현은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말씀에 나오는해산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해산이었던 것입니다. 해산, 후손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과정: 칭의를 넘어 영화까

사탄은 여인을 속였습니다. 하와를 속였지요. 그래서 하와는 그로 인해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해산의 고통이 더해진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출산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수가 늘고 인간 사회가 점점 성장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세상에는 점점 죄가 번성하고 악이 기승을 부리며, 고통과 슬픔이 더욱 많아지는 그러한 미래를 향하여 인간 세상이 흘러 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해산 속에 빛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있었고, 후손은 단순히 자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메시아를 의미하는 이었고, 메시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 믿음의 백성들 이었습니다.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때가 찼을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땅에서 이루어 지게 되었고, 세상에 가득했던 모든 어둠과 고통을 이기는 감추어진 비밀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산의 고통은 단순한 육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사실은 믿음의 자녀들이 땅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과 유혹에 대하여 싸우게 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그런 고난 속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함께 지며, 주님과 함께 걸어 간다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있음을 증명하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을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는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믿음으로 너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단지 칭의를 통한 의롭다 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 입니다. 칭의를 통한 의롭다 여기심은 구원의 부분일 뿐이며,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수많은 일을 겪고 이겨 냄으로써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은 신앙이 없는 자처럼, 하나님을 떠날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내고 속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기도 조차 나오지 않는 답답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해야 지도 모를 만큼 올바른 믿음과 신앙에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는 순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며 다시 주님 앞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자의 인생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과 제가 얼마만큼 스스로의 믿음에 대하여 감정적으로나 혹은 지식으로 확신하는 와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확신을 가지는 것은 기쁜 일이며, 신자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바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이는 좋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흔들리는 믿음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구원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여러분이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누구이신 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시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바로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해산의 고통과 생명: 십자가와

이제 이상 우리의 인생은, 그리고 우리의 해산의 수고와 고통들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자의 해산은 수고와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향해서 가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해산, 성도를 낳음,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남, 거듭남, 이러한 말들은 우리 신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로 부터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산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 서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자에게 임한 둘째 결과: 깨어진 관계 (다스림과 갈망)

오늘 성경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늘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관계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여인이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취하여 져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는 바로 질서에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땅으로부터, 흙으로부터 지어졌다고 말씀하시는 과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국은 관계를 결정하게 됩니다. 아담을 통하여 땅과 피조물과의 관계가 결정되었고, 거기에서 노동과 다른 것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인을 통하여서는 남자, 아담과의 관계가 결정되었고, 그리고 거기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인간의 관계에 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관계가 이제 죄로 인해 비틀려 지게 되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돕는 배필을 통해 인간이 누려야 했던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친밀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을 닮은 친밀성이 사라졌고,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라짐으로 인해 고통이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고통의 관계로 변한 결과가 오늘 본문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이니라.” 이전 개역 성경에서는 부분은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번역은 조금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따르고 사랑하며,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는 것이 어떻게 고통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제가 생각해도 이것은 그렇게 고통이 아닌 같습니다. 오늘 읽으신 개역 개정에서는 이를남편을 원한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만, 이것도 사실 아주 완벽한 번역은 아닙니다.

 

죄와 가인의 관계: 갈등의

이와 비슷한 패턴이 성경의 나오는데 번이 다음에 읽으실 창세기 4장에 등장합니다. 4 7 말씀 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것입니다. 가인에게 만약 네가 선을 행했다면 어떻게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장면입니다. 죄가 너를 원한다 라는 말씀의 뜻은 죄가 가인을 다스리고 삼키려고 한다는 것이고, 가인에게 죄악의 지지 말고 죄를 다스려야 한다 라고 명령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문장의 패턴이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구절의라는 단어 대신남편 넣으면 오늘 본문과 똑같은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은 이렇게 해석될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남편을 사로잡으려고 하고, 이기려고 하고, 다스리고 하는데, 남편도 너를 다스리게 것이다’. 죄와 가인이 서로 경쟁 상대가 되어 싸우는 처럼, 여자와 남자가 똑같은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부 싸움의 기원과 인류 관계의

여러분은 지금 부부 싸움의 최초의 시발점을 목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건실하고 착한 청년과 아주 아름답고 상냥한 여인이 만나서 결혼한 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매일 싸우는 발단이자 이유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부부 관계의 이야기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세상에 오직 사람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 크게는 모든 인류의 관계로 확대해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관계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은 존재가 것입니다.

 

죄의 뿌리: 하나님의 자리를 탐함 (지위, 소유, 재판권)

그러므로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이런 둘이 만나게 되면 사이에는 양보와 타협, 사랑보다는 힘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높은 자리에 있게 되는 지가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탐한 인간들이 자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가지 중요한 이익이 있습니다. 번째는 위치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누리는 번째 이익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상대보다는 대접을 받아야 하며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인간들이 참으로 피곤한 인생을 밖에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무리 기를 써도 자신 만으로는 만족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지요.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족하는 삶을 살면서도도 우리는 마음 한편으로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왕이라는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나의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필요해졌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이상 중의 살이요, 중의 없어지고나의 뼈와 나의 만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남의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나의 것만이 가장 중요해졌습니다.

 

번째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누리고자 하는 이익은 소유입니다. 소유에 있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남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가져야만 만족을 합니다. 그것이 돈이 수도 있고, 건강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못한 건강이나 부족한 돈을 가진 것으로 행복할 없습니다. 신기하지요. 우리 자신이라는 인격적인 존재만으로 우리가 만족할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이런 만족을 찾으며, 소유는 우리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우리를 시시각각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 자체로는 우리는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하고, 그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에서 배태되어 나온 아픔입니다.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부터 쉽게 해방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면 권세와 , 남들이 오를 없는 높은 위치와 인정을 원하며,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좋아 보이는 것을 가져 야지만 만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스스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버리게 것이죠.

 

자기 의로 치장하는

마지막 번째는 놀라운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재판권을 가지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한다는 말이 아니라, 결정권을 가지고 거기에 대한 재판을 하고 싶어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싶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일상의 대화 중에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할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할까요? 정확한 통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대화 중에 75% 정도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말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깜짝 놀랄 수치이지요? 나는 명인 반면, 지구에는 다른 69억의 사람들이 있으니 당연할 수도 있을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그것을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한다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아마도 75% 대화 중에 74.9% 바로 당사자 뒤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말해서뒷담화 좋아합니다. 일까요? 성경은 이유가 우리의 교만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 내가 남보다 낫고 남보다 높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림으로써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힘든 점이나 약점을 얘기할 , 물론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진정한 사랑과 배려라면, 여러분은 상대방의 약점과 아픔을 제삼자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하든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아뢰면 일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일을 전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일이 지금 그렇게 심각하게 들리지 않고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일들이라 자연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성경이 일을 얼마나 중하게 다루는지 아시면 여러분은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비방과 판단: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로마서의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근 수근 하는 자라.”. 여기서수근 수근 하는 남을 비방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같은 죄의 레벨에살인, 분쟁, 사기, 악독 등장합니다. 일까요?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권이며, 재판권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뒷담화를 그저 재미로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악의 없이 그냥 지나치는 이야기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쉽게 행하는 일이 사실은 죄의 근본적인 것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고 자주 행하며 당연히 여기는 일지도 모릅니다. 죄는 우리가 철저히 싸워야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싸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심코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내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이야기한 것으로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도 여러분 이외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결국 비방이 되는 것입니다.

 

비방의 죄와 싸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선은 말이 있으면 사랑으로 진실을 사람에게 직접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해야 사는 상황이라면 선한 것만 말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저의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자면,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간만 실천하시면 저희 교회는 반드시 천국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천국 같은 교회가 아직은 없는 것으로 비추어 보면 이것이 얼마만큼 어려운 인지를 쉽게 있으시지요? 왜냐하면 단순해 보이는 우리의 행동이 죄의 근원, 혹은 본성과 가깝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단순히 말조심을 하겠다고 경각심을 가지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인 의지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피해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내의 말로 인해 상처받고 여러 지옥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목격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의 본성과 너무나 가깝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남들의 칭찬을 들으시면 기억이 얼마나 오래 가시나요? 그냥 넘겨 지나치실 경우가 많으시지요? 그런데 만약 사람의 약점이나 사람에 대한 욕을 들으면 얼마나 기억에 남는 신기할 정도 입니다. 그에 더해 이러한 기억들은 잊어버려지지도 않고, 들은 이야기를 항상 진실로 생각하는 경향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듣지도 보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약점과 나쁜 점을 항상 진실처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중에 돌고 있는 가짜 뉴스가 성공하는 이유입니다. 이것도 같은 원리로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이지요.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죄의 본성상 수긍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함을 만족시켜 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험담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 만족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만큼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의 본성입니까? 여러분,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고통 중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은 아마도 우리의 혀에서 기인한 문제로 인한 것일 것입니다. 이유는 바로 혀가 재판관의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너무나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 11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이해하기가 조금은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구절은 금방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내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 이로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는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제가 지금까지 길게 설명한 부분을 구절로 깔끔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병듦과 회복의

그러면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어떻게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될까요? 왜냐하면 율법이 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비방하게 되면 행동 자체는 율법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말씀을 여러분이 비방하는 것이고, 말씀을 판단하고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하나님과 같은 재판관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교회는 직분자를 선출하는 투표를 하게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출된 장로님, 집사님, 그리고 목사님을 우리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할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것입니다. 교역자 분들에게도 오늘 우리가 설교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하는 지가 가장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하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이고, 죄와 가장 심각하게 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 분들에게도 말을 하는 일에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되겠습니다. 이처럼, 비방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에게 까지 피해를 뿐만 아니라,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하는 가장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에 가장 무섭습니다.

 

복음의 적용: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이러한 면에서 복음은 내가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혀로 증명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 앞에서 우리는, ‘나에게는 주인 있으십니다’, ‘나의 주는 하나님이시며 외에는 주인이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여전히 죄인 중의 괴수이며, 항상 그러한 본성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상 우리의 판단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똑똑하며, 많은 인생의 경험이 있으며,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지를 제가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것을 무시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모든 참된 지혜와 현명함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경외라는 단어는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영어로는 두려워하다 라는 뜻의 ‘fear’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포와는 다른 것입니다. 두려움은 공경에서 비롯된 두려움입니다. 마치 우리가 선생님을 항상 존경하며, 그로 인해 그의 말이나 가르침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근본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다고 지라도, 우리가 어떤 분야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제아무리 많은 인생의 경험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우리의 판단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판단은 많은 경우에, 사람이 보다는 낫지 못하다는 전제로 시작하게 됩니다.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를 상대방 보다는 조금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판단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오직 가지 판단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권면합니까? “그가 너보다 나은 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시죠? 그렇지만 우리가 판단을 진실로 버린다면 행동의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너무 약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듣고도 수근거리고 남을 비방하며 시기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약하지만 이런 저희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으므로 그냥 이대로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드려도 될까요? 아닙니다. 이것도 여러분의 판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에게 회개를 명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계속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릎을 꿇기를 원하십니다. 위에 계시는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래에서 남의 모든 것을 아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우리의 반응은 어때야 될까요? 다시 우리의 판단으로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의 판단이 옳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핑계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않고 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 넓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몸으로 산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때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되어 주시고 나도 판단에 따라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권위의 문제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권위는 참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부모의 권위가 있고, 동시에 자녀의 권위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편의 권위가 있고 아내의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와 질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존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권위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됩니다. ‘권위적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를 남보다 위에 서게 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과 계속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는 방법을 성경에서는 섬김이라고 표현하며, 소통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이해할 있을 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여러분이 교만과 싸우는 방법이며, 자신을 남보다 높은 위치에 놓지 않으려는 믿음의 행동인 입니다.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떻 해서 든지 상대방과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께 여러분의 평생에 걸쳐 그런 설득을 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 주시고, 끊임없이 설득하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우격다짐으로 한꺼번에 집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소통하고 설득시키셔서 우리를 자리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알게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큼 인내하시고 참으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사십시오.

 

저주 생명: 아담의 믿음과 하와(생명)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서 권세 잡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은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거나 성도가 되는 일에도 공히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조금만이라도 권위적이 되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우리들이 어떤 위치에서 것인가에 관한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를 어떠한 소유에도 만족을 하며, 재판관 자리에 앉지 않고 하나님의 밑에 앉게 하는 끊임없는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해결책: 가죽 (은혜의 예표)

저는 여러분이 바로 자리에 부름을 받은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없었던, 어떤 이들도 이룰 없는 자리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것을 주님 안에서 함께 누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애쓰고 힘들어 하며 어려워하는 자리에서 함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가 재판관이 되어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일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하여 비판을 하거나, 혹은 내가 상대를 향하여 실수를 했을 지라도, 우리들은 모두 회개하고 돌이켜 우리 공동체가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것을 있을 , 우리는 복되신 하나님의 공동체가 어떠한 것인 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실 것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복이 가득한 공동체를 누리는 복이 우리에게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합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가 주님으로 인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하여 힘이 납니다. 저희가 포기하고 싶을 , 내가 어쩔 없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연민하고 있을 ,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로 만족하기를 권면하시며, 분으로 다시 살고, 분의 성품으로 다시 일어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