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9-뱀과 유혹
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3장 1절에서 7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께서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으니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멘.
창조 이후의 시작: 창조의 완성점과 진행 방식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본 창세기 2장까지 말씀은 창조의 한 단락을 마무리 짓는 부분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그 관계는 단순히 사랑과 순종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닮은 관계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간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담이 이브를 보면서,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에 저희가 나눈 이 말씀의 교훈대로 여러분은 가정에서 여러분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인 배우자를 얼마만큼 잘 대하셨습니까? 여러분에게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면, 신앙적으로 본다면 주님의 몸 된 이 교회가 여러분들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그러므로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든지 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인 교회를 사랑하며 이 공동체를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창조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안식의 완성,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을 향해서 이 모든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 다스림과 순종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에게 두 가지 명령을 통해서 그 창조의 사역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는 아담과 이브에게 동산을 지키며 그리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돌보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의 완성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 존재인지, 즉 피조물을 다스린다고 해서 사람이 이 모든 창조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게 하셨으며,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다시 한번 더 정리해 보면, 첫 번째로 모든 피조물들을 잘 다스리고 돌보는 일,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다스림 속에서 사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강제한 법으로만 생각한다면, 저희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의 그 엄청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뱀의 등장과 그 정체에 대한 논쟁
오늘 저희들이 함께 나눌 이 말씀은 한 가지 중요한 논증과 그에 따른 세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논증은 오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뱀이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그 뱀의 유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교훈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타락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된 실로 엄청난 이야기들은 그 모든 것을 성경 한 장에 모두 담아 내기에는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뱀은 히브리어로 ‘나하시’(נָחָשׁ, H5175)라는 단어입니다. 우선 이 뱀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뱀은 누구인가?: 세 가지 해석과 비판
그런데 그 견해들을 우리가 살펴보기 전에, 왜 오늘 이 창세기 말씀에서 하필이면 뱀이 등장했는지 대해 한번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는 그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바로 이 뱀이 사탄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처음에 그냥 사탄을 등장시켜서 이 범죄를 일으킨 원인으로 삼지 않고, 뱀을 매개체로 사용하셨을까요? 이 질문에는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창조 사역의 완성을 위한 가장 첫 번째 명령은 바로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이나 사탄은 물론이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이름까지 지어주고 다스려야 했던 그 짐승의 하나인 뱀을 오늘 이 구절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보여 주시며,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구절에서는 사탄이라는 존재를 등장시키기 보다 사탄을 대표하는 피조물로서 뱀이라는 이름을 등장시킨 것이며, 이 사탄으로 대표되는 뱀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깨뜨리게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우리에게 고생길이 열리게 되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가 창조 시 가지게 되었던 관계가 무너지고, 사람에게 부여된 이웃 사랑의 명령이 지켜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 명령들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큰 도전이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사탄이 직접 사람을 유혹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섬겨야 할 이웃인 뱀이라는 매개체를 등장시켜서 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뱀이 의미하는 그 세 가지 중요한 사실들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이 뱀은 많은 유명한 그림을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나무에 매달려서 이브의 귀에 갈라진 혀를 내밀면서 속삭이고 있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뱀은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뱀이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들짐승인 뱀의 배후에 사탄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의 번역과는 조금 맞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3장 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이 3장 1절 말씀이 굉장히 이해하기나 난해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이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에는 심히 좋았다 라는 말씀을 하셨으며, 이 날의 피조물에는 당연히 뱀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뱀에 대해서 하나님은 좋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뱀을 가장 간교한 존재로 묘사합니다. 이 간교라는 말은 교활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굉장히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원래 이 간교하다 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지혜롭다 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가끔 교활하다는 단어로도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간교하다 라고 번역되었고, 그 이유는 바로 뒷 문장에 이 간교함을 묘사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간교하다 라는 표현은 올바른 표현입니다.
그러면 앞서 말씀하셨던 “좋았더라” 라는 표현과 서로 상충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면 번역을 “들짐승 중에 가장 지혜로웠더라” 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는데, 그것을 나쁜 것으로 혹은, 악한 것으로 번역하면 안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역은 아무 이유 없이 이 지혜로운 뱀을 이브를, 혹은 여자를 유혹하는 간교하고 교활한 생명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문맥이 잘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우리가 이 구절에 등장한 뱀을 자연적인 피조물로 본다면, 이 뱀에 사탄이 들어가서 뱀으로 하여금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게 하신 것일까요? 제가 이 창세기 3장을 서른 번 정도 정독해 보았지만, 이 구절에서 사탄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뱀 속에 들어가서 오늘 이 구절에 나온 유혹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사탄이 뱀으로 둔갑해서 이브를 유혹한 것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유추했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요한계시록에 나온 내용으로 인함일 것입니다. 계시록의 말씀입니다. “옛 뱀, 곧 사탄이라고도 하고”. 여기서 옛 뱀이란 바로 창세기에 나온 뱀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뱀을 사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계시록의 말씀이 맞다면, 오늘 이 구절의 뱀을 사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사실실은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은 지금의 의문을 해결하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인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진리와도 많이 충돌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뱀에 대한 저주로 하나님께서는 뱀이 배로 기어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뱀이 원래는 다리가 있었던 짐승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주의 결과로 다리가 갑자기 없어졌다는 사실은 진화론적으로는 아주 설명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바로 흙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저주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혹시 뱀이 흙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어떤 학자들은 뱀이 그 먼지를 먹어서 그 혀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이론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뱀의 주식은 쥐와 같은 설치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뱀은 흙만 먹고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다는 사실도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과 오늘 이 성경 말씀은 분명히 상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늘 이 구절의 뱀은 우리가 흔히 보는 자연의 뱀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구절의 뱀을 사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상징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 내용이 요한 계시록과 비슷한 형식으로 쓰였다면 이러한 상징적인 해석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창세기 1장에서 3장까지 표현은 약간의 문학적인 표현 방법이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로 상징적인 내용을 동원해서 창조를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 사실적인 언어들을 사용했으며, 그 언어들을 통해서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에 근거한 기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뱀을 상징적인 존재로 본다면, 그 구절 속에 함께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여지를 남기게 되는 것이죠. 즉 이 아담과 이브를 인류를 대표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신약에서 바울이 표현하는 아담에 대한 표현은 해석하기가 힘들어 지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둘째 아담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으며, 이 해석대로라면 예수님도 하나의 상징처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창세기 1 장에서 3 장까지 내용은 분명히 문학적으로 구조를 가지고 주제를 설명하고 있으며, 사실에 관련해서 이 모든 서사를 풀어내지만 그렇다고 과학적인 해석에만 기반하는 서술을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초 자연적인 사실도 함께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뱀에 대한 표현을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뱀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는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는 조금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며, 우리는 이 뱀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적 근거: "그 뱀", 사탄의 이름
하나님께서는 뱀이 지으신 들짐승들 중에서 가장 간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맥만을 본다면 이 뱀은 당연히 자연 상태의 들짐승 중 하나인 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한글 번역이 조금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가 아니라, “”어느 들짐승들 보다 더 간교하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원문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이 뱀은 더 이상 들짐승 중에 하나가 될 필요가 없어집니다. “개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다” 라는 표현에서는 그 존재는 반드시 개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들보다 더 똑똑하다” 라는 표현에서는 그 존재가 반드시 개일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지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뱀이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적인 뱀,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 하나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성경의 번역에는 빠져있는 “그” 라는 정관사입니다. 영어 식 번역에는 뱀 앞에 “그” 라는 정관사가 함께 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명사 앞에 정관사가 붙는다는 것은,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대상이 분명히 독특하고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 이 구절에 나오는 “그” 뱀은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들짐승 중 하나인 뱀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지금 이 창세기의 최초 독자인 출애굽 과정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뱀이라는 대상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을 때, 제일 처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제일 처음 그들이 떠올린 대상은 아마도 애굽에서 보았던 수많은 뱀 신들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 당시 이집트에는 아펩 (Apep) 이라는 신이 있는데, 이 신은 악한 신이며, 혼돈과 어둠, 그리고 죽음을 주관하던 뱀의 형상을 가진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막 나온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뱀” 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그 아펩 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 시대에 함께 살고 있었던 욥의 이야기도 함께 떠 올랐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전되어 오던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로 기록했던 것은 모세였지만, 구전되어 오던 이 창세기의 내용을 이들은 모르지 않았고, 당연히 함께 내려오던 욥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욥기의 내용 중에서 같은 단어인 “뱀” 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리워야단” 이라고 성경에서는 칭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성경 여러 구절에서 사탄을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서 27장 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여기서 말하는 뱀은 그저 바다에서 놀고 있는 그런 용 중에 한 마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탄을 상징하는 뱀, 리워야단을 칼로 멸했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뱀이나 용은 바로 사탄의 상징인 것입니다. 위에서 함께 살펴본 계시록 12장의 “옛 뱀” 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사탄의 이름을 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 3장의 그 뱀은 바로 사탄의 이름이기도 한 사탄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오늘 이브를 유혹한 이 뱀은 들짐승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바로 사탄이라는 말씀입니다.
뱀(사탄)과 창조 명령과의 관계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사탄의 존재를 들짐승과 연관시켜 비교를 하셨을까요? 오늘 이 들짐승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96회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14번만 제외하고는 전부 들짐승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14번은 생명체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 생명체라는 번역은 오직 에스겔서에서만 사용됩니다. 에스겔의 환상 중에서 “네 가지 생물” 이 등장합니다.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의 얼굴을 한 네 가지 생물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물들을 에스겔은 “그룹”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그룹이라는 것은 바로 천사의 한 종류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에 대한 비유가 에스겔서에서 사용된 이유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서 28장으로 가면 두로 왕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두로 왕을 타락한 천사로 비유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두로 왕을 옛적에 에덴에 있었던 그룹이라고 칭하며, 타락한 천사라고 부릅니다. 즉 시돈의 두로 왕이 타락하는 모습이 마치 에덴동산의 그룹, 즉 천사가 타락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즉 타락한 천사와 같이 그 지혜를 더럽혔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처음 창세기 말씀에서는 뱀이 가장 지혜로웠으나, 사실은 그 지혜를 더럽힌 간교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지혜롭다는 번역 대신 교활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이 확실해졌습니다.
이 사실들이 이해되셨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확실한 사실들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가장 확실한 것은 이 뱀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하나인 뱀이 등장함으로써, 아담과 이브가 이름을 주고 다스리는 사명에 도전하는 존재로 이 뱀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뱀은 피조물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타락한 천사인 사탄도 피조물이 뿐입니다. 두 번째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이 뱀이라는 존재가 사탄의 이름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성경 전체의 내용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 사탄이 에덴동산에 나타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이 사탄을 뱀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탄이 오히려 다른 짐승의 모습이 아닌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저의 견해입니다. 하지만, 제가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이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대한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지만, 성경 어느 부분에서도 구체적으로 이를 설명하는 구절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바로 오늘 이 창세기의 내용에서 그 사탄의 유혹을 이브가 너무나 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짐승이 말을 하는 내용은 오늘 이 구절을 포함해서 딱 두 번 나옵니다. 바로 민수기에서 발람 이라는 선지자에게 나귀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때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기 위해 나귀를 쳐서 가게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시어 발람에게 경고를 하시는 내용이지요. 어찌 보면 이 장면은 그 짐승을 말을 하게 하여, 굉장히 극적인 전달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구절의 뱀이 말을 하는 것에도 그렇게 크게 이상할 것이 없지만, 오늘 이 구절에서의 내용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이브가 뱀이 말을 한 내용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너무 쉽게 그 말을 듣는다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가장한 천사의 모습으로 이브에게 나타난 것이 오히려 그녀가 사탄의 말을 듣고, 그 유혹에 넘어가기가 훨씬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적으로 저의 추론이며,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어느 부분에서도 명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이 구절에서 성경은 이 뱀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연에서 흔히 보는 짐승으로서가 아니고 그 이상의 심각한 사건들과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 가지 교훈: 유혹의 패턴 분석
그러면 오늘 이 부분이 함유하고 있는 중요한 세 가지 교훈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교훈 1: 관계를 공격하는 사탄
첫 번째는, 오늘 이 뱀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지금 막아서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시험이라고 부르지 않고 유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유혹이 그 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유혹의 패턴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이 뱀이 이브를 유혹할 때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편집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그 내용에 짧은 문장 하나를 더 붙였습니다. 즉, 모든 실과를 먹어도 된다는 말씀 바로 뒤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신 내용을 그 앞 뒤를 조금 바꾼 후, 한 문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탄이 무엇이라고 말하였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런데 이 문장을 만드는 데 딱 한 단어가 새로이 첨가됩니다. 여러분이 이전에 공부한 적이 있는 “로” 라는 단어입니다. “로암미” 라는 이름을 공부할 때, “암미”, 즉 나의 백성이라는 단어 앞에 부정 접두사인 “로” 를 사용하여, 나의 백성이 아니다 라는 저주의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먹으라는 단어 앞에 “로” 를 붙여서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기도 합니다. 틀리지 않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단어 하나를 더해서 이 말씀을 왜곡하려는 것 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탄은 이러한 말씀의 편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누구이신 가 하는 그 실체를 뒤틀려고 하는 것입니다. “로” 라는 부정 의미의 단어를 첨가하여 하나님 말씀의 진의를 살짝 변경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탄은 이를 통해 아담과 이브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뀌게 하려고 하는 저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탄은 이 창세기 3장에서 어찌 보면 가장 은밀하고 무서운 신학자로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굉장히 일관성 있게 아담과 이브에게 설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부정하는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먹지는 못하게 하시는 분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냥 단순한 사탄의 말장난 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사탄의 아주 내밀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앞에서 창세기를 공부해 오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먹는 행위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즉, 이 먹는 행위는 인간을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용한 양식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지금 사탄은 그 먹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사탄은 인간에게 너는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지 않지만, 너는 너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냐 라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먹지는 못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너희들은 너희들의 힘으로 먹을 것을 만들어서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너희 자신을 의지해서 살아야 할 것이 아니겠 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소통의 단절: 타락의 시작
다행히 이브는 사탄의 이 유혹에 대해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먹게 하셨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뒤에 또 사탄의 패턴을 그대로 좇는 말을 더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드디어 사탄의 말을 듣고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언어적인 그 표현인 것입니다. 뭐라고 하였나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라고 덧붙였습니다. 어찌 들으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똑같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셨던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단순히 글자를 더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이 이면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더해서 더 엄격한 명령을 인간이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덧붙인 이브의 말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브의 해석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성경 암송을 잘못한 게 아닙니다. 이브는 “이 실과를 먹으면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한국어 번역은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나 킹 제임스 번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죽을까 하노라” 가 아니라, “너희가 죽지 않도록” 이라고 번역합니다. 즉, “죽지 않도록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라고 하셨다는 이브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인용해서 라기 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해석을 했을 때의 태도에 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브가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에 순종하여 이 실과를 절대로 쳐다보지 말고 절대로 가까이해서도 안 된다 라는 뜻으로 해석을 했었다 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금하신 이유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이렇게 해석했다면 그것은 어쩌면 칭찬받을 만한 해석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해석을 한 저의는 바로 하나님은 엄격한 분 이시며 그렇게 때문에 그 명령을 더 엄격하게 이야기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 이었습니다.
교회의 위기: 공동체 관계의 중요성
여러분, 혹시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그 비유에서 한 므나를 받은 종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니이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이 종은 주인이 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래서 그 므나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숨겨서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거기에 대해 그 종의 주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약 네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면, 즉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죠, 그 돈을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불려야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주인은 전혀 그렇게 엄격하고 나쁜 주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한 므나의 관리에 대한 주인의 명령을 단지 엄격한 명령, 이것을 지켜 내여야만 한다는 명령으로만 받았던 것입니다. 만약 그 종이 그 주인을 사랑했었다 면 그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 애를 썼을 것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이 므나의 비유에 숨겨져 있는 교훈의 일부분입니다. 결국 주인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그 주인은 그저 법을 정하고 지시만 하는 주인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먹지 말아라” 라고 하시면 그 이야기를 들은 아담과 이브가 단순히 기계적인 복종으로 먹지 않아 버렸습니다. 이것이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이 명령을 통해서 교훈을 원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가, 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시는가 라는 질문을 당연히 해야 할 지혜가 있는 아담과 이브가, 단순히 하나님은 엄하신 분이므로 그 명령은 보다 더 엄하게 지겨 야만 한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대한 잘못된 지식 때문에 결국에는 왜곡이 생겨나게 되고 그 왜곡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만들게 됩니다.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죄: "DeGoded"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그리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경건한 방법으로 요. 그래서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나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다르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주고 율법을 지키게 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벌을 주는 하나님 외에는, 그리고 그 율법을 왜 지켜야 되며, 하나님께서 왜 그런 법을 주셨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법이 우리로 하여금 메시아를 향해 가게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며, 열심으로 그것 만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큰,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기도하라” 하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기도는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기도하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 배, 만 배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순간 순간 하나님을 구할 수 있고, 우리는 기도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서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서는 살 수가 없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되고, 그 은혜를 갈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기도하고, 소통하고, 동행하시며, 나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기도는 진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권면을 명령으로 여겨 평생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더라도 그 순종이 자칫하면 이브처럼 하나님을 오해한 데서 시작한 순종이라면 아주 위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내용들은 전부가 다 우리들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덕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으면 하나님의 성경 지식이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굉장히 뛰어난 성경 학자가 되시나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기를 원하시나요?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쩔 때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시는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일 수가 없지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위험성
만약, 아담과 이브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들이 사탄의 유혹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명령만을 지키면 된다는 그 단순한 생각이, 그들의 신앙 전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내겠다 라는 생각이 그들의 참 신앙을 공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하나님을 바로 알자, 하나님의 나를 향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내가 깨닫고 그것에 따라 내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라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단순히 이렇게 명령하셨으니까, 나는 이렇게 복종한다 로 끝이 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자식으로 알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받아들이고 행동했으니까요. 이것이 오늘 다룰 세 가지 교훈 중에 첫 번째입니다.
교훈 2: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함
두 번째 교훈은 간단합니다. 우선 이 뱀이 쓰는 단어를 통해서 사탄의 유혹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3장 4절에서 5절 까지 내용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심이니라.”. 4절의 너희는 누구를 지칭하나요? 이브 혼자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를 함께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이 지금 이 이야기할 때, 확실하게 아담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분명이 아담은 그 근처에서 뱀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브가 나중에 그 나무의 실과를 아담에게 주는 장면을 떠올려도 이것이 사실임이 거의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뱀은 여자를 먼저 유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자들은 마음이 아주 약해서 이야기를 잘 들을 것 같아서 그랬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여러분은 사탄을 아주 우습게 무시하며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 여성이 남성보다 귀가 얇고 유혹에 약하다고 나오나요? 그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도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남녀의 관계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남성이 일으킨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 구절은 그런 편견을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게 만듦
오늘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오늘 이 사탄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고백, 즉 “내 살 중의 살이며 뼈 중의 뼈” 라는 선언을 통해 이루려고 하셨던 그 가정 자체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아담 자신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돕는 배필인 여성을 공격함으로써, 그 가정 전체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탄의 이 공격은 단순하게 이브가 말 실수를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아주 치밀하게 계획한 죄였던 것입니다. 즉, 가정, 좀 더 크게 보면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같은 삼위 하나님의 교통하심과 친밀하심을 닮아야 하는 그 모든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무너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선 사람과 사람이 멀어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오늘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브와 아담의 행동을 살펴보겠습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들은 서로 소통해야만 했습니다. 이 뱀의 유혹이 들어왔을 때 이브가 했었어야 할 첫 번째 일은 아담과 소통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 아담과 의논을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이브는 혼자 생각하여 결정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그로 인해 이 둘 사이의 소통은 없어진 것을 알 수 있고, 이들의 관계는 이미 깨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치밀한 전략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이 타락은, 그 목표 지점을 향한 정확한 공격으로 인해 창조의 첫 시작 지점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공격 전략을 우리가 잘 알아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모습은 삼위 하나님께서 그 연합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그러한 친밀한 관계, 즉 성부와 예수, 성령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그 고통과 친밀함 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 교회 내의 소통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에서 사탄은 “너희”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서 사람 간의 관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 관계의 붕괴를 위해서 사용된 이 “너희” 라는 단어에는 이처럼 굉장히 무서운 흉계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담과 이브의 소통이 막히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인간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즉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 인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내가 항상 그 관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타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죄의 핵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오늘 이 타락의 핵심을 D.A. Carson 목사님은 “DeGoded” 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쫓아내고 내가 그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간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리고 이를 위해, 오늘 이브는 “DeHusband” 와 “DeMan” 을 먼저 하였습니다. 즉, 모든 인간 간의 관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이 모든 죄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라는 교회 속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진정한 관계가 흔들리게 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우리를 그 우상의 자리로 올려놓는 그 엄청난 죄악으로 갈 수 밖에 없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예배는 드릴 수 있겠지만, 그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 이 죄악은 서서히 우리를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팬데믹의 이 불행한 시간이 무서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된 성도의 관계 내에서 잘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탄은 그 위기를 유혹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와 상황이 점점 더 약해지고 흔들리게 되고,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에게 위기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위기의 시간에 좀 더 열심히 공동체를 사랑해야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멀지 않아서 하나님을 “DeGoded” 시키고 우리가 생각하는 우상을 그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외치고 찬송을 하지만, 결국 우리가 예배 드리는 대상은 우상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1, 2, 3 서에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들려주시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리가 보고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요한 사도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만큼, 그 공동체의 관계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원하십니까? 이제는 더 이상 다른 교회를 기웃거리지 않고, 이 교회에서 뼈를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 험난한 시대에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의 교회에 희망을 가지고 싶다면 여러분은 오늘 이 교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훈 3: 타락의 과정: 듣고 싶은 말을 따름
오늘 이 말씀이 저희들에게 들려주시는 마지막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탄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탄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담과 이브가 이러한 거짓된 유혹에 속아 넘어가게 된 것일까요? 말씀을 분명히 알고 있는 아담과 하와가 이러한 단순한 거짓에 어떻게 넘어 가게 된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 사탄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한 아담과 이브의 모든 관심이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도 집중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브의 대답 에서 그것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이브가 듣고 싶은 말, 즉 그녀가 기뻐할 만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너가 죽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살 것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라고 말을 하지요. 그리고 그 말에 우리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들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으로 가신 분들이 왜 저렇게 되었나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으세요? 이단에 빠진 분들의 대부분의 공통점은 그들이 교회에 실망을 한 사람들 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성도 간에 그 친밀한 관계와 사랑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결국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함을 느끼고, 결국은 그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단의 가르침이 들어오고, 자기들이 믿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이단 교회로 끌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단에 빠지신 분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 그 유혹에 흔들려서 내가 듣고 싶은 말 만을 듣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점검: 신앙의 기초와 동기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얼마나 많이 세례를 받기를 원했는지 알고 계시나요? 그들도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고 싶어하였다는 것이 복음서 내용에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깨끗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회개하고,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만큼, 그들도 회개하고 용서받고 깨끗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왜 요한은 이렇게 얘기했을까요? 조금은 너무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 사람들도 세례 받고 깨끗해지기를 원한다면 요한이 좀 해줄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서 곧 있을 진노를 피하게 한 사람이 누구냐 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들이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 결코 하나님을 생각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단지 나 중심의 믿음으로 내 구원과 나의 경건만을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면 우리도 결코 바리새인과 사두게 인이 받았던 그 질책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는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오고, 새벽 기도도 매일 드리고 매일 성경 읽기도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마음이며 신자로서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심의 밑바닥에 그 모든 행위의 중심에 내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결심을 당장 집어 치우셔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이 가져야할 마땅한 모습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주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의 실천을 하기 전에 우리들의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다시 점검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설령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할 지라도, 우리는 이 신앙의 기초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처럼 똑똑한 사람도 흔들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독교를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오늘의 이 교훈을 깨닫고, 오늘 이 말씀 앞에 서서,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의 처음, 가장 기초부터, 내 마음의 깊은 바닥서 부터 나는 왜 예수를 믿는 지, 나는 왜 하나님의 나라를 소원하는지, 나는 왜 기도하는 지, 나는 왜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 진정한 마음의 소원을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꼼꼼히 그 마음을 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 열심히 드리고 충성되게 살기 전에, 내가 정말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그 구원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고 받아 내기를 원하는 구원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절망이 아닌 소망: 참된 확신의 길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두려움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자장 깊숙한 기본부터 다시 생각하기를 권면하는 이 말씀이야 말로 우리들로 하여금 가장 큰 확신과 기쁨에 이르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설교를, 말씀을, 기도를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됐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준다는 바로 그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이런 물음에 직면하면 많은 분들은 그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여러분이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 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고 절망스럽다면, 그 절망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절망이 구원의 확신보다 더 놀라운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 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그것이 너무나 귀중해서 내 인생에서 그것을 빼앗기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그 순간이야 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는 바로 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점검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저주와 공포와, 그리고 협박이 아니라, 확신과, 기쁨과, 평강을 주는 일입니다. 그 주님에게 달려가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점검함으로써 그 평안과 기쁨을 놓치지 마시고 오늘부터 더욱 더 누리시고 그리고 그 누리는 평강과 기쁨으로 마음껏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합시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혹시 그 유혹 속에 있다면 지금 달려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혹 그 유혹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주님, 저희의 귀를 닫아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향해서만 저의들의 눈과 귀를 열게 하여 하소서.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저희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주님, 인도의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