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태초에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귀 기울여 듣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멘.
창세기 강해 시작의 동기
오늘부터 저희가 창세기를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창세기 강해를 시작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저희가 겪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과연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며,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은 누구이신가?”, 그리고 “이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뜻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함께 공부하고 생각할 창세기 강해를 통해서 그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의 기본 구조
오늘 함께 나눌 본문은 창세기 1장 1절인데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고, 많은 분들이 암송하고 있는 구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창세기 전체는 사실, 크게 보면 두 개의 큰 역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장부터 11장까지로, 이는 우리가 대개 인류의 공통 역사, 혹은 “원역사”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12장부터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아브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여러 족장들의 역사가 50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구조: "톨레도트"
하지만 이러한 대략적인 구분은 성경을 읽는 독자의 편의가 많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50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창세기가 50장으로 나뉜 것은 사실 14세기의 일입니다. 그전까지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포함한 모든 성경에는 “장”과 “절”이라는 구분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전적인 방법으로 창세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1장, 2장, 3장이 아니라 10개의 굉장히 중요한 구조가 창세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톨레도트(Toledot)”, 즉 쉽게 말하면 “족보”라는 말로 “장”과 “절”을 대신해서 창세기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11개로도 나눌 수 있지만, 크게 열 개의 족보가 등장하고 그 족보들의 단락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창조 기록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창세기 2장 4절에 있는 첫 번째 톨레도트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죠.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그래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것처럼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다 나와 있잖아요? 6일 창조가 창세기 1장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을 시작할 때 뭐라고 하시냐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라”. 이 말은 “하늘과 땅의 족보다” 이런 말이에요. 하늘과 땅이 어떻게 이 땅에 오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다음 창조된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다시 한번 설명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이 톨레도트 문장이 이 사건의 앞과 뒤를 나누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원래 톨레도트란 단어는 “낳는다”, 혹은 “잉태한다”라는 뜻의 “얄라드(H3205)”라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단어가 뜻하는 “낳다”, “잉태하다”는 후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톨레도트가 “후손”, “자손”, “그다음 세대” 그런 의미를 뜻하는 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톨레도트라 하면, “아담의 자손들”, 혹은 “아담의 후손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창세기 5장 1절을 보시면 그 아담의 후손들의 이야기가 연속해서 기록되어 있죠? “이것이 아담의 계보라.”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아담의 후손들은 어디서 나왔죠? 아담이죠. 데라의 후손은 데라로부터, 에서의 후손은 에서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후손은 야곱에게서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후손들은 각각 누구로부터 나왔는지를 말해주는 말씀이에요.
1장 1절에 "톨레도트"가 없는 이유: 절대적 시작
그런데 이 구절들을 읽다 보면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2장 4절에 처음으로 나오는 그 톨레도트가 그 후로 계속해서 10번이나 나오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처음 1장 1절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1장 1절에서도 이 톨레도트가 나왔으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마태복음 1장처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고 그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톨레도트라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나왔느냐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톨레도트가 없는 것이죠. 이 말씀은 이 시작이 어떤 것에서 나온 것이냐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시작하신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태초에"와 무(無)로부터의 창조
많은 분이 창조를 이야기할 때면, “빛이 있으라” 이걸 제일 먼저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 그 다음에 계속해서 하늘이 생기고, 바다가 나뉘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하십니다. 6일 창조를 많이 생각하죠. 그러나 그것은 1장 3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1장 2절을 보시면 거기에는 흑암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물도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빛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지금 알고 있는 천지창조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라는 것은 아닌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어디에 표현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방금 말씀드렸듯이 창세기 1장 1절에만 유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태초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에”라는 말 자체를 보면 우리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잠언 8장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말씀으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알고 있죠?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만세 전”, “태초”, “땅이 생기기 전”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땅이 생기기 전을 “태초”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자, 그럼 땅은 언제 생겼나요? 땅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1장 3절 이후에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태초”란 말 자체는 그런 땅을 비롯한 모든 것이 생기기 전, 아무것도 없을 때, “무로부터”라는 그런 말입니다. 이 말은 아주 간단한 말이죠. 이 모든 세상의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게 사실 우리에게 굉장히 대단한 말이지만,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도록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원독자(이스라엘 백성)에게 "태초에"의 의미
여러분! 이 글을 제일 처음 읽었던 사람이 누굴 것 같아요? 이 성경책을 모세가 처음 썼는데, 누가 제일 먼저 들었을까요? 네, 맞아요.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때 애굽으로부터 나와서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어서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광야, 사막이라는 것이 어떤 곳이죠? 생명이 살기 어려운 곳이에요. 그곳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금 이 광야를 이동하고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할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죠.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왔는데, 가나안은 보이지도 않고 주변에는 적들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들었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 강한 적들 앞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처음 들은 말이 뭐냐 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우리를 이끌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 것 같으세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 주위에는 많은 가나안 족속과 이집트 백성이 있었고, 이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태양신도 섬기고, 달의 신도 섬기고, 심지어는 개구리 신도 있었고 또 나일강의 신도 있었죠. 이런 수많은 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이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 거거든요.
다른 신화와의 차이점
그 당시에 있었던 많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발견되었고, 우리도 그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리스 신화뿐 아니라 바벨론 신화도 있고 수메르 신화들도 있죠. 그런 신화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성경에서도 그런 신화적인 요소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창세기의 첫 부분은 정말 독특한 부분이거든요. 대부분의 신화에서는 그 신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싸워서 이 세상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예를 들면 마르둑이라는 신은 티아마트라는 신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가지고 상반신으로는 하늘을 만들고, 하반신으로는 땅을 만들었다고 신화는 이야기합니다. 또는 서로 협상을 하거나 아주 끔찍한 전쟁을 해요. 이렇게 전쟁을 통해서 인간과 이 세계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전쟁이 없어요. 하나님과 맞서는 신들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내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말씀하시죠. 그것 외에 다른 어떤 말이 필요 없는 거죠.
"태초에" -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답
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었던 많은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데 그 말에 대해 여러 가지 자상하고 친절한 대답들이 여러분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있을 수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매일 만나를 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마실 물을 내어 줄게.” 이런 모든 친절한 말들이 아니라, 성경 말씀의 첫 마디는 이런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게 정답 중의 정답인 거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일지라도,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고 처해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일지라도 이 문장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 만물들을 창조하셨다!” “만물의 주인이시며, 만물을 지으신 분이다!” “무엇이 도대체 문제가 되느냐, 어떤 것이 우리를 흔들 수 있는가?” 이런 말씀으로 우리들의 문제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혹은 눈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에게 참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이 상황을 겪어 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도 있고, 또 내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업이나 일들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요. 내 인생에 대해서 여전히 우리는 고민이 많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와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할 때가 있고, 가정에서 기쁘고 행복하지 못해서 힘들 때도 있고, 교회 때문에 답답하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나눈 이 구절이야말로 여러분 모두를 위한 진정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많은 현실적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많은 생존의 문제들로 방황하고 있는데, 우리의 이 세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광야를 창조한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서 너희를 내가 지키지 못하겠느냐?”
죄와 죽음 속에서의 창조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적을 만납니까? 돈이 적이 되기도 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적이 되기도 하고, 질병이 적이 될 때도 있고, 심지어는 나 자신이 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적은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으로 죽는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을 결정짓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너희의 죽음 속에서 심지어 내가 너희를 새롭게 창조한다!” 지금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인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육체의 유혹에 빠져서, 그로 인한 죄들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죄로 가득한 이곳에서 내가 너희를 창조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새롭게 하고 있다!” 이것은 다윗의 시편에 있는 내용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하나님이 정말 안 계시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정말 돌아가셨느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내가 그분을 바라보며 도움을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너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렇게 지으신 이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 1절과 6일 창조의 관계
우리가 조금 아까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1장 1절의 내용과 1장 3절 이후의 내용 사이에 약간의 간격 혹은 분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의 '무로부터의 창조'와 3절 이후의 '있는 것들(땅, 흑암, 물)을 통한 창조'는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장 1절을 단순히 표제어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문맥을 보거나 또는 그 성경 단어들을 연구해 봐도 알 수 있듯이, “태초”와 “창조” 라는 단어는 명백히 “무”로부터 “유”가 나오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1장 3절 이후에 나오는 6일 창조, 즉 물이 있고 흑암이 있던 곳에서 빛과 만물이 창조되었던 그 부분과 구별됩니다.
그래서 6일 창조는 바로 땅, 즉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정돈하고 채우는 창조입니다. 우리가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6일의 창조는 땅의 창조, 즉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의 창조인 것입니다. 하늘이 있고 바다가 있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공기가 있고 물이 있고 짐승이 있고 새가 있는 바로 이 세상, 즉 땅의 세상입니다.
"천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면 1장 1절에는 천지라고 말씀하셨으니까, 하늘과 땅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땅은 앞에서 설명했으니까,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일까요? 그 하늘은 우리가 보는 세계와는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다 합쳐 천지 즉, 만물이 되는 거죠. 우린 대개 만물이라 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보이는 세계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여러 번 발견되는 이런 구절들은, 신약에서도 바울에 의해 언급됩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 1장 16-17절 말씀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조를 얘기하시면서 그 창조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을 다 창조했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다면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번역을 해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시니라.”
이 두 가지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에덴이 나오고 최초의 인류가 나오는 땅의 세계만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덴을 창조한 것이 끝이 아니라 이 만물을 완성하시려고 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려면 이 땅의 눈에 보이는 세계의 완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함께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만물이고, 그 만물이 충만해지고 완성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자 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창세기를 읽을 때,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믿음과 보이지 않는 세계 (히브리서 11장)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러한 보이는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앞으로 있을 강해들을 통해 하나씩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6일 동안 세상이 만들어지죠. 그 이야기가 곧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가 더 알 수 있는 것은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와 함께 있으며,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그 유명한 “믿음 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기록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세상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전혀 모르지만, 하나님이 지었다고 말씀하니까 그냥 믿음으로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이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아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라”는 유대인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왜 “믿음으로”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이 말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뒤에 따라오는 말씀을 더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사실 아브라함으로부터 설명합니다. 그전에도 물론 “믿음으로”라는 말이 다 들어있지만,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 땅에 살았지만, 장막에서 살았다고 얘기합니다. 어디서 살았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에 살고 있었는데, 그 땅에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그 땅을 하나님께 받아서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장막”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살았을까요?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이 장막에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장막에서 살았을까요? “나중에 잘 될 거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장막에서 살고 있지만, 이 땅 모두가 다 우리 것이 될 거다.”, “조금만 참으면 이 힘듦이 다 지나갈 거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는 믿음이었을까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삼대에 걸쳐 가나안 땅을 한 평도 못 가졌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거기서 장막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으로 그 힘든 시간들을 살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시기만 지나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그런 인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이 나그네로 산 이유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무엇을 보았다는 것일까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성도는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합니다.
성도의 삶: 보이지 않는 본향을 바라봄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표현과, 또 혹은 “내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라는 표현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본향, 우리의 나라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의 장막에서 아무런 세상적 성취가 없이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데도 그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은 후,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속이 많이 상할까요? 하루 종일, 그렇게 기분이 참 좋다가도 여러분의 집에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정말 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돈을 잃어버렸다면 또 기분이 나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부분 이런 사소한 세상적인 것들로 기분이 상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바는, 우리들은 그 모든 것들에 의해서 흔들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은 잠시 거할 장막이고, 우리들의 거처는 사실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본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확신이 언제 가능할까요? 그것은 이 하늘에 있는 것의 가치를 알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걱정과 노고를 견디며, 하늘의 본향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본향이라고 말하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것이 단지 미래에만 쓸 것이 아니라는 그 부분이 바로 이 천지 창조의 내용 중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창조의 완성: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통합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될 때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같이 완성이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리 온전한 구원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육신의 부활과 함께 우리의 영이 영광 속에 있게 되고, 우리가 완전한 하나의 하나님의 인격체로 완성되는 그때를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육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우리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창조가 온전히 완성되는 게 바로 구원이기 때문에, 이 창조 속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분명히 약속하시는 그 승리가 이 땅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경험들을 우리는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항상 패배하는 것처럼 여겨질까요? 왜 우리는 이 땅에서 승리의 경험을 누려보지 못한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치를 모르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진짜로 누리고 있는 가치가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태초에”라는 단어를 주목하게 하십니다.
창조: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우리 세계로의 들어오심
이 “태초에”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시작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난 시점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시간이라는 것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존재이시며 영적인 존재이시며, 형상이 없으시고,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관계없으시며, 그리고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같은 피조 세계 속으로, 즉 이제 이 세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만들어지면서 하나님께서 그 시작과 함께 들어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게 “태초에”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낮추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은 성육신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와, 하나님의 그 시간이 이제 시작되었고, 그리고 이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밝히 나타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이 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당신의 마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무엇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지를, 그 창조라는 것을 통해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유한한 우리들이 이제 영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생명을 가질 수 없는데 생명이신 하나님의 힘입어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창조와 성도 안의 새 창조
따라서 첫 창조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신자의 삶을 사실은 훨씬 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만드셨잖아요. 그리고, 이제 우리가 공부해 나가겠지만, 이 온 우주를 하나님의 처소로 삼습니다. 하늘이 보좌고 땅이 그 발등상이라고 표현하시지요? 하나님을 그 안에 담아 둘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보이지 않는 그 영광을 우리가 보는 이 세상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서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원한 처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는데, 저희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 거룩한 사건을 우리는, 이 창세기의 사건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안에 창조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을 한번 생각해볼까요? 첫 아담이 인류의 머리가 되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영광을 누리도록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첫째 아담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 오셨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무엇의 머리로 오셨습니까? 인류의 머리? 아닙니다. 성경은 교회의 머리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 오셔서, 그 교회로 하여금 그 놀라운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가 어떤 존재냐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한 곳입니다. 여러분은 그 창조와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고 노래합니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충만하심, 하나님의 놀라우심과 아름다우심을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만물에 하나님이 충만하시다고 말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서 이 세상이 신적인 어떤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만물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낸다는 그런 뜻입니다.
믿는 자 안에서 시작되는 "태초"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창조되었다”라는 말이나, “우리가 새 창조다”, “우리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라고 말할 때, 바로 그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 “태초”가 우리에게도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저 추상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을 기다리거나,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이신 그 하나님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듯이 우리에게도 태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하늘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안에서 땅을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흑암과 어둠 속에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 빛과 영광도 함께 우리에게 비춰 주십니다. 보이는 삶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인 하나님의 영광된 그 하늘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이 땅 속에서 고난과 어려움 속에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너희가 반드시 승리하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하늘의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여러분과 저는 예수를 믿고 따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태초가 우리 안에서 시작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질 때에도, 우리는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십자가와 용서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지치고 피곤할 때에도, 내 안에 끊임없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는, 나에게 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을 이루시듯이 내 안에서도 그 창조의 마지막까지 일하실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가끔 이제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안에서 영원한 창조를 영원히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히 주님을 찬양할 것이며, 영원히 새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처럼 창조적인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이 창조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의 무로부터 창조하시는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태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지음을 받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광들이 풍성하게 열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연약합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죄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존심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 저에게는 끊임없이 제 자신을 내세우고 싶고, 죽지 않는 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저는 혼돈 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께서 “무”로부터 이 모든 것을 꽃피우실 것입니다.
결론 및 격려
여러분! 코로나가 무섭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겠습니까? 바이러스 하나가 우리 모두를 이렇게 두려움과 불안과 그리고 불편함 속에 떨게 합니다. 짜증나게 하고 힘들게 하며, 참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 조그만 바이러스 하나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놀라운 선언이 어찌 여러분을 치료할 수 없겠습니까? 어찌 여러분을 다시 세울 수 없겠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마무리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희에게 이루어진 창조가 과연 어떤 것인지, 우리는 역사의 체험을 읽듯이 창세기를 읽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를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광의 나라를 우리가 깨닫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말씀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이 땅에 속해 있는 것 같으나, 하늘에 속한 자인지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 안에 태초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알게 하소서. 하늘과 땅이 만나며, 영원한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며, 그 주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자들임을 깨닫게 하소서. 또한 체험하게 하소서. 내 안의 시작된 이 태초의 영광을 체험하게 하소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그 말씀처럼,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우리의 마음속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그 열매들을, 그 놀라운 창조의 역사를 우리 안에 체험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