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강해 설교집/창세기 강해

창세기-89-무슨 소용인가

lampchurch 2025. 7. 24. 10:09

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25 27절에서 34 까지 입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아멘.

 

에서와 야곱 이야기: 팥죽 그릇과 장자권

지난주,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이어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텐데, 이야기는 팥죽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것으로 많은 분께 익숙할 겁니다. 이야기에는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은 대개 인물의 성격을 자세히 분석하기보다, 그저 ‘이런 사람이 있었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만 기록합니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의 성격과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집니다.

 

모세의 주석: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에서

성경은 주로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지만, 모세는 부분에 대해 직접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더라”** 명확하게 해석해 줍니다. 이는 에서의 행동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구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줍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는 거죠. 본문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에 ‘과연 에서는 어떤 사람이고 야곱은 누구였을까’ 하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성격 대비

여러분, 에서는 사냥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고, 밖에서 하는 일들을 즐기며 건강하고 강인한 스타일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그의 몸에서 산과 , 밭의 냄새가 났다고 정도이니, 이삭이 냄새로 에서가 왔음을 알려고 했다는 것을 보면 에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고 묘사됩니다. 이는 매우 대조적인 성격으로,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전혀 달랐습니다. 야곱이 조용했다는 말은 단순히 말이 적었다기보다, 원문의 의미상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내성적이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 활동하는 것보다 안에 머무는 것을 선호했고,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며 마음속에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모의 편애: 가정 불화의 시작

사실 에서와 야곱 이야기의 가장 문제 하나는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부모가 각자 자녀만을 편애한 것이 집안의 갈등을 키웠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모두 공평하게 사랑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을,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편애는 문제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에서의 성품: 솔직함, 관용, 그리고 충동성

우리가 팥죽 이야기를 통해 있듯이, 에서는 매우 열정적이고 솔직하며 직선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는 말을 꾸밈없이 직설적으로 합니다. 사람들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인물이었을 겁니다. 사실 야곱보다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었죠. 밖에서 많은 일을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겼던 반면, 야곱은 그런 면에서 에서와 달랐습니다.

 

저는 에서가 굉장히 통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 야곱을 만났을 , 야곱이 자신의 재산을 에서에게 주려고 하자 에서가 "나도 만큼 있다. 가져가라" 말합니다. 저라면 일단 받아 놓고 생각했을 텐데, 에서는 야곱의 재산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돌려주었죠. 이는 그의 면모와 상당한 관용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거의 탈취하다시피 하여 도망갔을 , 성경에는 에서가 그를 쫓아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을 만났을 먼저 달려가 그를 안고 맞춘 사람도 에서였습니다. 에서는 여러 면에서 맏아들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들이 부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성급하고 충동적이며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팥죽 앞에서 그는 충동적으로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이는 그의 성격이 부정적으로 나타날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짐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지키고 가져야 소중한 가치보다 눈앞에 있는 것에 쉽게 흔들리는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성품: 치밀함과 기회주의

야곱은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보면 있듯이, 그는 매우 계획적이고 계산적이며 섬세하고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짐승을 길러 이익을 냈던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이러한 성격도 부정적으로 나타났을 때는 얼마나 기회주의적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서가 팥죽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을 ,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장자의 명분을 사려 했습니다. 그는 계산적이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습, 그리고 상당한 야망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성격의 명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제가 에서와 야곱의 성격을 이토록 대조하여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흔히 에서는 충동적으로 장자권을 팔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서지 못하고 결국 장자권을 잃었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반대로 야곱은 비록 얄밉고 부정적인 면이 있었음에도 장자권의 중요성을 깨닫고 어떤 수를 써서든 그것을 얻으려 계획했고 귀하게 여겨 취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무언가 잘한 것이 있고 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죠.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람 모두 우리와 다를 없는 모습이었고, 그들이 지닌 문제 또한 같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격은 각기 다르고 독특하며, 이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격이 급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느긋하거나 세심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통이 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성격은 모두 다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성격적 특성들이 항상 장점으로만 발휘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가장 장점들이 때로는 단점으로 작용하곤 합니다. 이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한 장점들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성품으로서 신속함을 주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조급한 행동으로 바꾸어 충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결국 단점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과 에서가 분명히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그로 인해 한쪽이 낫거나 한쪽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둘은 똑같았고, 그들이 직면한 문제 또한 같았습니다. 사실 다음 주에 이삭과 함께 본문을 깊이 다룰 , 우리는 야곱의 문제점도 분명히 보게 것입니다. 야곱이 과연 잘했던 것일까요?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깊이 들여다보면 에서의 문제와 야곱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선한 성격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게는 우리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크게는 우리가 가진 선한 성품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자권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의 소유와 그리스도의 그림자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싸움꾼이었고 매우 치밀했습니다. 팥죽 사건에서도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며, 기회가 오자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습니다. 성경은 그가 사람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다투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편을 들고 에서의 편을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야곱은 잘했고 에서는 잘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 이야기가 전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쉬운 접근 방식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편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이죠.

 

오히려 팥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야곱이든 에서든 은혜를 얼마나 외면하는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은혜를 깨닫거나 기뻐하거나 높이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외면하는 인간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있습니다.

 

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 먼저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장자'라는 말을 들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물론 "처음 "라는 의미일 겁니다. 집에서 처음 사람, 특히 아들, 혹은 처음 거둔 열매, 짐승 중에서도 처음 등이 그렇죠.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아마 재산 문제일 겁니다. 장자는 모든 재산의 갑절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다섯이면 재산을 다섯으로 나눈 개를 장자에게 주고, 나머지 개를 가지고 나머지 명이 나눠 갖는 식입니다. 자녀가 많으면 문제가 덜하지만, 둘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지죠.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의 경우, 이삭의 재산이 장자에게 '몰빵'되게 되어 있었으니, 사건이 어떻게 풀릴지에 대해 야곱과 에서 모두 엄청난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에서 역시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을 재산과 관련된 가정의 '흑역사' 수도 있지만, 사실 장자가 여기서 중요하게 되는 진짜 이유는 재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출애굽기 13 2 말씀을 읽어 드릴 테니, 이것이 중요한지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라 하시니라." 장자라는 것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우주 세상의 모든 , 이스라엘에 태어나는 모든 자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이것을 구별하여 "나의 "임을 확인시키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장자됨' 확인시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역시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모든 민족 중에 장자로 삼아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스라엘이 장자이자 동시에 제사장 나라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위한 제사장입니까? 바로 모든 이들을 위한 제사장이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택함과 그리스도의 구원

여러분, 우리가 이스라엘 나라를 이야기할 종종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으므로 그들이 많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야곱과 에서 누가 많은 복을 받았습니까? 바로 에서가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에서의 자식들은 모두 되었고, 열두 명의 두령이 모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땠나요? 그는 평생을 고생하다가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총리로 살았지만, 바로 앞에서 "내가 백이십 살았는데 인생이 힘들고 고단했다" 말합니다. 누가 나은 삶을 살았다고 있을까요?

 

여러분, 택함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 모든 이들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게 것이다." 그렇다면 복을 받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의 자손으로서 혈통을 통해 땅에 오셨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것입니다.

 

막힌 담을 허물다: 에베소서의 가르침

여러분, 에베소서를 보면 가끔 찬양을 하다가도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막힌 담을 허시고 주님 앞에 나간다" 찬양을 많이 부르죠. 에베소서에 그런 내용이 나오니 좋게 들리겠지만, 사실 문맥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겁니다. 말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나갔다" 생각하지만, 에베소서에서 말씀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이스라엘과 그들이 ''라고 여기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 그들이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 에베소서가 묻는 것은 이겁니다. "너희가 그렇게 막힌 담을 허문 것이 복음이요 십자가의 역사인데, 어찌 서로 미워하고 서로 받아들일 없다고 말할 있느냐? 너희가 ''라고 여기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이들과 너희가 하나가 것이 아니냐?"

 

백정과의 식사: 교회 공동체의 의미

여러분, 조선 시대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영의정이나 좌의정이 백정의 집에 찾아가 "너는 친구다" 하며 같이 밥을 먹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언뜻 이해될 같지만,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없는 일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에베소서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너희 성도들, 너의 형제자매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있단 말이냐? ' 사람은 저랑 성격이 맞아요', ' 사람은 답답해요', '나는 내가 편한 사람만 만나기도 힘든데'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 앞에 있는 변명이 될까요?" 에베소서는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진정 무엇인지를 이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권의 멸시: 에서의 죄와 우리의 문제

여러분, 구약에서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장자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무엇을 가볍게 여겼던 걸까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장자권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물론 에서나 야곱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명확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삭이 야곱에게 속아 복을 선언하는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삭은 분명히 **"너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에서가 그것을 사실상 가볍게 여겼다고 표현합니다.

 

아마도 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재산 ? 몰랐을까?' 알았겠죠. '그거야 나중에 벌어서 채우면 되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복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번째 문제입니다. 에서는 팥죽을 보고 " 뻘건 가져와라"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다소 거친 표현이기에, 학자들은 에서가 상당히 거친 사람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고 담백하며 직선적인 사람들은 대개 말해놓고 뒤끝이 없다고들 하죠. 에서는 뻘건 것을 당장 가져오라고 정도로 급했습니다.

 

그때 야곱이 묻습니다. "정말 형의 장자권 나한테 거냐?" 에서가 대답합니다. ", 지금 내가 당장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장자권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그는 장자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에서를 망령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 12장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구원과 믿음: 신앙의 시작점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는 "너희가 자꾸 멍에를 씌우고 그들에게 '너는 성경 공부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 '너는 기도해야 성도가 되는 것이다', '너는 이런 것을 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 말라. 하나님이 언제 그런 것을 요구하신 적이 있느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지난주에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구원이라는 것은 믿음 더하기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행위는 반드시 구원과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예수 믿기 위해서 죄를 먼저 회개하고 깨끗하게 되어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 청교도들 간에 가장 논쟁 하나가 바로 부분이었습니다. "당신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죄를 뉘우치고 돌아와서 주님 앞에 오십시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시어, 시기와 방식은 없지만, 어느 내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때 우리는 ",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것을 회개와 믿음의 고백을 통해 고백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흔들림 없는 믿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구원은 여러분의 믿음을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은 우리 신앙에 참된 열매를 맺게 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만약 출발점이 분명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계속해서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게 겁니다. '내가 이래서 구원받을 있을까?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은 의문에 사로잡히죠.

 

만일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나서도 ',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는구나' 하는 모습을 보게 , 여러분이 해야 일은 '내가 구원받지 못했나? 이래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있을까?'라고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주님, 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여,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잊었던 주님의 십자가,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다시금 붙들고, 흐려진 믿음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여러분의 행동 가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예전에는 기도 열심히 했는데 이제부터는 열심히 해야지', '성경 열심히 읽어야지' 같은 다짐이 여러분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역사할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지 말라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하나님이 너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멸시하느냐? 어찌 그리 말할 있느냐?" ', 나는 은혜가 부족해서 지금도 모양 꼴로 살아. 하나님이 해주시는 어떻게 ? 나는 믿고 싶은데 마음이 뜨거워지질 않아. 하나님, 마음 뜨겁게 해주세요. 그럼 내가 앞으로 예수 믿을게요'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멸시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토록 여러분을 위해 일을 이루시며 참아주시고 인내해 주시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진정한 복음이 지닌 능력입니다.

 

에서의 망령됨: 세속적인 마음

그런데 에서는 사실상 문제에서 처음부터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장자의 명분을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망령되다'** 말은 번역에서 **'속되다'** 번역된 같습니다. 이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오직 재물로만 여기고, 그것들의 가치를 계산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몹시도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을 세상의 복보다 가볍게 여긴 것이죠.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나에게 지금 당장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중에 준다는 나에게 뭐가 그리 유익이냐?" 묻습니다.

 

첫사랑의 의미: 성장하는 관계로의 전환

여러분, 우리도 에서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 힘쓸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너무 달아서 시간 가는 몰랐습니다. 기도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습니다"라고 고백하곤 하죠. 그리고 덧붙여 "목사님,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첫사랑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음도 이해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첫사랑에 대해 다루었지만, 첫사랑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처음 시작했던 감격적인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이 처음 관계를 시작했을 때의 사랑은 분명 소중하지만, 성경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길을 동행하게 되고, 하나님이 그때부터 여러분을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신앙이 식어 농땡이를 부리고 있거나, ', 내가 언제쯤 다시 뜨겁게 신앙생활을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그렇게 자신 없어 하십니까? 자신을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이라면 벌써 쫓겨났을 텐데' 하고 생각할 있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가 가장 뜨거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 순간이 바로 '진짜'입니다.

 

결혼 생활과 신앙: 깊어지는 사랑

여러분, 결혼 생활과 신앙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뜨겁죠. 하지만 그렇게 뜨겁게 평생을 살면 굶어 죽을 겁니다. 얼굴만 보고 살아갈 있을까요? 매일 숟가락 젓가락도 없이 밥상에 뭐가 올라왔는지 상관없이 '너만 보고 있으면 배가 부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죠. 누가 그렇게 있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배우자와 서약했듯이, 삶의 책임을 지고 나가 열심히 일하며, 생활을 계획하고, 자녀를 낳아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며, 아이를 키우기 위해 때론 다투고 갈등하며, '네가 잘났네', '내가 못났네' 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용서하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통해 가정이 세워졌을 , 비로소 ' 사람들은 정말 그럴듯해지는구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과정도 해내지 못합니다. 싸우느라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과정이 되었을 우리는 ", 이것이 사랑이 깊어지는구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스무 살에 만나 마냥 좋았던 시절을 누구나 추억합니다. 그때는 그저 손만 잡아도 짜릿했으니까요. 물론 지금도 손을 잡으면 짜릿하다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게 사랑의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은 말로 없는 책임감과 사랑, 그리고 자녀를 끝까지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깊은 고민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오셨고, 주님이 길을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나님과 때로는 갈등하고 부딪혔을 겁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살았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 우리와 맺은 결혼 서약을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아플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어떤 때든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겠다' 약속처럼, 주님은 여러분과 심지어 죽음조차도 갈라놓지 못할 약속을 하셨습니다. 주님과 여러분이 지금도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의 교회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렇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뜨거웠던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식어가는 것처럼 느껴지죠. 말씀만 들어도 은혜가 되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신앙이 식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마음속에 욕심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밭이 엉겅퀴와 가시나무로 뒤덮이듯이, 세상에 대한 염려와 걱정들이 당연히 우리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미움과 실망이 고개를 들죠. '내가 예수를 믿으니 이렇게 하면 진정 하나님의 교회가 텐데. 내가 꿈꾸던 교회의 모습이 있어야 텐데' 하고 가졌던 마음들이 현실 속에서 많은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이르지 않습니까. "너희가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우리 삶에는 너무나 많은 낙심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 이건 되는구나. 역시 포기하자. 사람이 하는 일인데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어디 있겠어?' 하며 포기해 버리곤 하죠. 만일 지금 이런 마음에 사로잡혀 계신 분이 있다면, 시간 회개하고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세운 교회도 아니고, 여러분의 힘으로 세울 교회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감정적으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육신적인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실망과 사람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무리 깊을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귀한 명령은 결코 사라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름받은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답게 세우는 , 일을 우리가 이루어내고 이루어내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교회로서 사는 것입니다. 교회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아래의 감정: 참된 순종

여러분, 우리가 실망하게 되면 실망이 마치 돌처럼 마음에 박혀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런 말을 자주 하죠. "알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죠. 사랑하라고요. 그런데 사람 얼굴만 보면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러면서 마음이 닫힙니다. 특정 사람만 만나면 그렇게 되는 거죠. 이는 여러분의 감정과 마음이 성경 말씀 위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위에 있는 겁니다.

 

순서가 정확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감정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해 ',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나의 감정과 생각들이 틀렸구나' 하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설령 아파서 눈물이 날지라도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공부하기 싫지? 누가 좋아해? 그래도 공부해야 한다"고요. 왜냐하면 그것이 해야 일이고, 올바르고 바른 일이기 때문이죠.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공부합니다. 그때 우리가 아이를 보며 '위선을 떤다' 말하나요? ", 너는 마음으로는 공부하기 싫으면서 울면서 공부하니 위선적으로 살면 "라고 말하지 않죠. 오히려 그것이 바로 책임이며, 네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속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일을 , 자신의 감정과 관계없이 언제나 위선을 떠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우리의 모습

여러분, 위선을 떨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사님, 저도 하고 싶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가서 사람에게 잘해주고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하겠어요. 저는 A A, B B처럼 마음도 움직여야 함께 일할 있어요"라고 말하는 . 사실 그것이 위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생 죄인인데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진정으로 하고 싶겠습니까? 어쩌다 잠깐 제정신이 아니어서 주님의 일을 했을 , 정신이 제대로 박히면 하겠죠. 우리는 것만 챙기고 나만을 위하려 할까요?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비로소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위선을 떠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 그리고 구약 성경 전체가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에서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볍게 여겼다고 표현하는 . 그것이 바로 **'멸시했다'** 것입니다. 말라기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아버지를, 종은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멸시했는데, 하나님이 '너희가 나를 멸시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멸시했습니까?'라고 되묻는 겁니다.

 

말라기서는 질문이 번이나 반복되는 재미있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때 너희가 나를 멸시했고, 이때 너희가 나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 대접을 언제 주었느냐?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너는 나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냐? 네가 나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주인의 명령을 잊지 않고 일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힘을 다한 적이 있느냐? 그저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있지 않느냐? 너는 나를 멸시한 것이 아니냐?" 그러고는 여전히 '내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라고 되묻는 것이죠. 구절을 읽으면서 역시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역시 비슷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합니다.

 

멸시의 다양한 얼굴: 감사와 만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손가락이 조금만 아파도 "하나님 사랑이시라면서요!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라는 말이 곧바로 튀어나오죠. 생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근심거리만 생겨도 "하나님, 죄인들은 저렇게 사는데 저만 이렇습니까? 하는 일마다 이렇게 풀립니까?"라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한 적이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 하나님이 물으시면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하나님, 저희가 언제 하나님을 무시했습니까? 언제 하나님을 잊었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제가 표현하는 번째 깊은 문제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여김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죠. 아닌 같다고요?

 

여러분은 장자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장자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근심이 생겨도, 작은 걱정거리가 생겨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은 소용이 없다고 느낍니다. 일단 문제가 해결되거나 돈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죠. 우리는 모든 은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이것들이 무슨 소용이냐"** 묻습니다.

 

자녀에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엄마가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듭니다. 아들이 건강이 좋지 않아 소금이나 것을 먹으면 되기에, 그런 재료를 제외하고 정말 힘들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줍니다. 그런데 아이가 먹더니 "이건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너무 맛이 없어!" 하며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초콜릿 달라, 아이스크림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울죠. 여러분, 생각해 보면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어릴 밥을 먹겠다고 하면 엄마들이 쫓아다니며 밥을 먹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두세 밥을 먹겠다고 하니 말이죠.

 

저도 혼자서 10년을 자랐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가지는 확실히 압니다. 어릴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에 어머니가 서울우유를 시켜주셨는데, 저는 매일 번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셨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전부 개에게 주고, 고양이에게도 조금 주고, 친구와 바꿔 먹곤 했습니다. 먹기 싫어서 그랬죠. 어릴 때는 우유가 그렇게 맛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거 하나 먹어주는 것도 큰일이라고 여겼는지, 어머니께 가서 " 오늘은 마셨다!" 유세 아닌 유세를 떨곤 했죠. 아이들이 밥을 먹을 때도 그러지 않습니까. ", 오늘 먹었다!" 제가 드라마를 보다가 그런 대사가 나오는데 너무 공감이 되었습니다. 자식인데 어머니가 얘기하는 겁니다. ", 먹어주는 것도 유세다. , 지가 먹으면서 그것도 유세지. 에미는 그냥 ' 먹었냐' 묻는 죄고, 자식 새끼는 툭하면 ' 먹어' 이게 유세라는 거야." 들으면서 정말 그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우리의 불평

여러분, 이렇게 바꿔 생각해 볼까요? 교회에 나와 주는 것조차 유세라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언제 나를 사랑했느냐?'라고 묻는 것처럼,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받고도 '내가 언제 하나님을 사랑했냐?' 혹은 '하나님이 나를 언제 사랑하셨냐?'라고 되묻지는 않나요? '내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했냐' 생각하시겠죠. '예배도 빠지려고 노력하고, 헌금도 잊지 않고 하려는데, 같은 사람 없습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여러분이 지금 세상 근심에 휩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조차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걱정으로 가득 오직 문제 해결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인생이 불행해 보이고, "나는 내가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을까?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걸까?" 하는 불안과 불행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모든 것이며, 내가 너를 위하여 목숨을 주었다" 주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죠. 십자가로도 만족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구절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사탄도, 권세도,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늘에 있는 권세들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사랑을 결코 끊을 없을 것이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고백: 말씀을 가볍게 여긴

최근 자신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잘못 전하거나 저를 변호하는 듯이 비칠까 염려되어, 솔직히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역시 목회를 하면서 자주 실망할 때가 있고, 대부분은 저의 부족함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성도들이나 다른 목회자들은 모이면 "설교를 했는데 하나도 변한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합니다. 역시 그렇게 느낄 때가 있고,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는 자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 과연 내가 목회를 잘하고 있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그때 저에게 좋았던 성도들과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설교에 대한 고민을 나누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대화가 깊어져 제가 가진 고민들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장로님과 집사님도 계셨는데,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변명도 무수히 했던 같습니다. 잘하고 싶은데, 저만 혼자 모든 화살을 맞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저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해서 '인간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에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분들은 이야기를 모두 받아주고 이해해주셨으며, 동시에 그렇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을 ,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때 불현듯 이런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푸른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것이다." 제가 설교도 했던 말씀인데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이리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는가?'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내가 이토록 가볍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 내가 말씀을 가볍게 여겼구나.'

 

하나님의 약속: 우리의 기쁨과 자랑

물론 여러분도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는 안에 거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면, 우리는 말씀을 결코 가볍게 여길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되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밥을 먹지 않으려 해도, 결국 여러분의 입에 밥을 넣어주는 분은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여러분을 기르시고 키우실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된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매일 주님 앞에 "주여, 어찌하오리이까?"라고 부르짖을 , 하나님께서는 "네가 믿을 것은 자신이 아니라, 너의 확신이 아니라, 나의 약속이며 영원한 나의 말씀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여러분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흔들리지 마십시오. 가볍지 않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여러분의 진정한 기쁨과 자랑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다시 시작할 기회: 회개와 은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팔았는데 그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가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했지만, 그는 회개할 기회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야곱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다릅니다. 우리는 장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이며, 그렇기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다시 일어나 걸을 있는 사람이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있는 사람이며, 울며 주님을 끌어안을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위하여 울며 탄식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아갑시다! 일어섭시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았습니다. 저희가 뒤로 물러서거나 실망과 좌절로 가득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주님을 멸시하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자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온전히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