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4-에덴동산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 8절에서 17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내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서론: 특별한 공간, 에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혼돈과 공허에 질서를 잡으시고 그 안에 채우셔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거기에 그냥 두셔서 살게 하지 않으시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어떤 특별한 지역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밖의 지역에서는 살 수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분명히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에덴이라고 알고 있는 그 지역을 만드시게 된 것입니다.
에덴의 목적: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
하나님의 목적은 원래 어떤 한 구역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세상을 충만하게 하고,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그 뜻과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사람들을 맨 처음 지으시고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이라는 곳을 다시 만들었다는 의미는 그냥 단순히 에덴에서 인간들이 보다 더 잘 살게 하려고, 혹은 에덴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이 에덴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한 지구상에서 살기보다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게 하려는 그러한 의도를 가지는 장소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동산": 소유와 임재의 의미
그렇다면 이렇게 특정한 구역을 만들어서 에덴 동산을 만드신 하나님의 그 이유를 깊이 살펴보는 것은 우리 신앙을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장소는 에덴 동산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에덴은 아담이 살았던 동산이지만, 아담의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산, 여호와의 동산이라고 불렸습니다. 에스겔서 28장 13절에 이렇게 기록됩니다. “내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라고 하시며 각종 보석의 이야기가 곧이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것이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에스겔서 31장에서도 등장하고, 이사야서 51장과 창세기의 다른 구절에서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동산이라고 에덴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동산이 누구의 소유라는 것을 의미합니까? 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동산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위하여 지었지만, 이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곳은 하나님이 집과 같은 역할을 하는,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사람을 두셨다는 뜻은 그 동산에서 사람들과 소통하시겠다는 뜻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곳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통치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장소를 우리를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에덴과 하늘 성소의 연결
이 사실을 조금 더 간단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당신께서 보여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에서 하늘과 땅을 얘기할 때 그 하늘에 속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 즉 “천지”라는 단어에서 천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 즉 영어로 Sk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의 그 성소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소가 지금 에덴 동산이라는 곳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물질 세계에 거주하시는 첫 번째 모습으로서 에덴동산이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겨자씨와 누룩처럼
그러므로 이 에덴동산은 우리에게는 마치 성전과 같은 장소가 된 것입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네,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동산이며, 동시에 성전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기를 특별한 구역으로 정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임재하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고, 또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이 그에게 부어지는 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실질적으로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을 때 사용하셨던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가 기억하십니까? 그 비유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원래 겨자씨처럼 조그마한 것이었으나, 이것이 자라서 전체로 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던 겨자씨가 나무를 이루어서 여기에 새가 깃들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창조의 사건에 있어서도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사람과 함께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에덴 동산이 처음에 시작하는 출발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천지를 처음 지으실 때부터 모든 만물들이 땅에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셨으며, 그것이 지금 이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만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전 지구를 다 만들어 놓으신 후 우리들에게 그곳으로 가서 이것을 전부 다 정복하며 살아보라고 시키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곳을 택하시고, 그곳에 구역을 정하신 다음, 그곳에 임재하셔서 사람들과 함께 거니시며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지으신 온 우주를 향하여 그 나라를 같이 출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덴"의 의미: 풍요 너머의 기쁨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잘 표현된 것이 바로 “에덴 동산”이라는 단어입니다. 우선 “에덴”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이 구절이 굉장히 재미있는 구절입니다. 저희들이 지난 주 살펴본 내용 중 비가 오지 않아서 거기에 식물이 자랄 수 없다는 내용이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비를 내리게 하셔서 식물을 자라게 했습니다. 또 거기에는 경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밭에 채소가 없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비를 주시며,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창조의 문제 해결: 식물, 사람, 물
즉 처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 먹을 식물에 대한 문제가 존재했고, 그 이유는 세 가지 부재 때문입니다. 바로, 식물을 자라게 할 비, 밭을 경작할 사람, 그리고 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세 가지 부재를 해결하는 장소를 정했으며, 그곳이 바로 이 에덴 동산이었던 것입니다. 먹기 좋은 나무의 실과들이며, 그리고 거기에 아담을 데려다 놓았고, 마지막으로 강들이 그 장소에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충만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생생하게 그림으로 상상해 보시면 이 장면이 얼마나 장엄하고 역동성이 있었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먹거리인 열매들과 채소입니다. 식물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그것을 경작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그것들을 자라게 할 수 있는 비와 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에덴 동산에서는 그 모든 것이 풍족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에덴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에덴이라는 단어의 뜻에는 풍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일까요? 그것보다는 에덴이라는 단어에는 기쁨이란 의미가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기쁨의 동산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풍요롭기 때문에 기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이 땅에서 우리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식물들을 경작할 수 있으며, 비와 물을 주어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시므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채워지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 구조적 유사성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이 에덴을 정의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에덴 동산이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이 에덴동산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 좀 더 깊이 보겠습니다. 이 에덴 동산은 잘 알다시피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닫히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동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성막을 방문한다고 가정하면 제일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성소와 지성소라는 것입니다. 우선, “Holy”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성소가 있으며, “Holy of Holies”라고 일컬어지는 지성소가 붙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큰 휘장 하나가 위로부터 아래로 펼쳐져 있어서 이 두 장소를 나누며, 그것으로 이 지성소 안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막아 놓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막아 놓은 휘장 앞에는 그룹이라고도 부르는 천사의 모양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즉, 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도록 지키고 있는 모양을 가집니다.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다음 하나님께서 그 동산 입구에 불 칼을 두시고 그룹들을 세워서 그들이 다시 들어올 수 없도록 하신 장면과 아주 유사합니다. 이처럼 지성소에도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에덴 동산 자체가 하나님의 성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지성소는 바로 하나님의 “시은좌”, 즉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이므로, 이 에덴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이 지성소가 바로 에덴 동산이라는 말씀입니다.
찢어진 휘장: 에덴으로의 회복된 길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의 일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주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그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단 한 번에 찢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휘장이 찢어져서 지성소로 가는 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우리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늘 시민권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실이 그렇게 큰 의미로 마음에 와 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유대인으로서 살아본 적이 있었다면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대제사장 한 명뿐이며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번만,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도 대제사장의 발에 방울을 달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들어갔다가 조금만 잘못되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 휘장이 찢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사실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느니라.” 이게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분명히 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성경에서 바울은 아주 놀랍게도 우리가 지금 하늘에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찬송가의 고백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고 고난에 가득 찬 삶을 살더라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험하며, 우리는 약해서 병에 시달리기도 하며, 아픔과 고통에 신음하며,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고난으로 내 마음이 너무 힘들며 지쳐 이 땅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우리들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하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 하늘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땅에서도 살고 있는 사람이나, 동시에 여러분은 감추어져 있는 하늘에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와 영원한 소유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이해하기가 쉬우실 것입니다. 미국이 지금 강대국이라고 우길 수 있겠으나 역사를 보면 로마 같은 나라도 망했습니다. 미국이 물론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나라도 여러 민족들이 얽혀 있는 합중국인 한 나라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확신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도대체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릴 수도 있고 결국은 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을 유일한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늘은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여러분이 속해 있으므로 여러분은 망하지 않는 나라에 속해 있는 백성인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항상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은 이 땅에서 망할 것 같아 매일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고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여러분을 떠나지를 않지요? 그래서 바울이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집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너희는 하늘에 속해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 하늘의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 한 너희는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한, 우리는 흔들리고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잃어버리거나 모든 소유가 다 없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순간에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속되게 표현하면, 우리에게는 최소한 본전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항상 본전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살아볼 만하다는 것입니다. 뭐, 무엇을 하더라도 본전은 남는데, 그까짓 거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잃어봤자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고 항상 가지고 가는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덴의 참된 기쁨: 하나님과의 동행
그러므로 이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그 사실, 그것 때문에 성경은 아담이 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복을 참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풍성한 것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직접 아담과 함께 있는 것, 즉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또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소유로 인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나,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소유이면 어떠할 것 같은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면 그때 우리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매일 하나님과 거닐 수 있고 매일 그분을 알아갈 수 있으며, 매일 그분의 선하심을 본받으며, 그 선하신 뜻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크나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담이 에덴에서 누릴 수 있었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기쁨의 본질: 사랑의 성취
여러분과 저도 이 기쁨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기쁨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기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우리 속에서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디에 가장 관심을 가지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가장 기쁩니까? 계획했던 일들을 이루어 내었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평소에 가장 취미 생활을 하거나, 원했던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졌을 때, 성취했을 때, 그때 우리는 기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았을 때도 기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은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어렵게 살았던 때에 손주를 키우시는 할머니가 계셨다면 만약 어느 날 저녁 귀한 고기를 구울 때에 그 할머니 입으로 들어가는 고기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모두 다 손주들의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손주들에게는 할머니는 이미 많이 먹었다고 둘러댑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할머니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랬습니까? 고기를 싫어해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손주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주가 먹는 것만 봐도 그것이 진정으로 기쁘신 것이며,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대상 전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기쁨이라는 것은 사랑이 이루어질 때, 사랑이 그 목적을 이룰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면 여러분은 기뻐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관심이 있으며 좋아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면 여러분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기뻐지기 위해서 우리가 바꿔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잘되는 것 등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여러분의 기쁨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오래 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그런 인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두렵고 힘든 일들이 다시 생기게 되면 또다시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기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구주로 믿으며 그 주님을 따르기로 우리가 결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그 기쁜 뜻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이 되는 것이라고요? 네, 바로 우리에게 기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자체가 기쁜 일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의 기쁨: 바울의 역설
그 인생이 순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생이 항상 잘 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울 수도 있고, 아주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 확신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현실은 힘들고 고통도 따를 수 있지만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성경에서 표현했던, 항상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아무 속도 없이 무엇이든지 기뻐하고 모든 일에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성경에서 죽을 지경까지 이르도록 힘들었고,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그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항상 기쁘다!” 정말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해졌습니까? 그것은 그의 기쁨의 근원, 그의 기쁨의 방향, 그의 기쁨의 이유가 자기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고통을 당하나 주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고백될 때, 그는 그것을 기쁘다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힘들더라도 여러분이 죄와 싸울 때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죄와 싸우다가 조금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버티고 조금이나마 그 죄에 반항이라도 해 보았을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특하게 보셨다는 믿음 때문이며,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능력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깨달어져서 기쁩니다. 화가 나지만 그래도 우리를 힘들게 한 그 상대를 위해 기도해야지 하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비록 내 마음을 조금은 쓰라리게 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내 인생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짜증나는 일들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우리들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참아내야 합니다. “그냥 하루 겨우겨우 참고 넘겼다”가 아니라, 그것이 신자인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정말로 기쁜 인생입니다.
여러분, 어쩔 때는 예수는 내가 믿었는데 복은 주로 옆에 있는 사람이 받는 것처럼 보일 때가 정말 많습니다. 내가 참는 바람에 상대방은 이유도 그 즐거움을 누릴 때가 많습니다. 나의 양보로 상대방이 영문도 모른 채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쁜 인생이라 부릅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에서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주 안에서 하늘의 성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구별된 공간, 안식의 시작
그러면 이번에는 에덴 동산에서의 “동산”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동산 (Gan)의 의미: 구별과 거룩
동산은 히브리어로는 Gan (גַּן, H1588)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을 히브리어로는 “Gan Eden”이라 부릅니다. “집”은 히브리어로 베드(בַּיִת, bayith)라고 부릅니다. 베들레헴에서의 “베들”이 집이라는 뜻입니다. “헴”은 떡을 이야기하니까, 떡의 집이라는 뜻이죠. 베델의 “베”도 역시 마찬가지며 하나님의 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Gan Eden이라 하면 에덴 동산이 될 것입니다. 이 Gan이라는 단어는 그러므로 동산이나 정원을 뜻하는 것이며 영어로는 Garden이 될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 이 Gan이라는 단어를 Garden으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에덴 동산이 조그마한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역이 정해져 있는, 그래서 울타리나 경계가 정해져 있고 문으로 통과하는 그런 장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즉, 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울타리가 있고 경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에덴 동산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왜 에덴을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우선 외부의 적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적이 있었으므로 나중에 나오겠지만요.
그러나 이런 의미보다는 이 울타리를 쳤다는 말을 통해 이 장소가 구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이 더 큰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동산 밖에서는 식물들이 야생의 상태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울타리 안에서는 아담이 이 식물들을 경작하게 될 것입니다. 작물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뭔가를 구별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별이라는 말을 우리는 다른 말로 거룩하다라고 합니다.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에 하나님이 안식하시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즉 이 안식일을 구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을 거룩하게 하시고,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 지금 공간을 구별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에덴에 '두심': 안식(누아흐)의 시작
그래서 아담을 이끌어서 이 에덴동산에 두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두다”라는 단어가 아주 기가 막힌 단어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십니까? 이전에 안식이라는 뜻의 “Sabbath”라는 단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 하나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누아흐” (נוּחַ, H5117)라는 단어입니다. 이것도 역시 안식하다는 뜻의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이끌어 여기에 두셨다고 하셨을 때, 그 “두셨다”라는 뜻의 단어가 바로 “누아흐”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슨 뜻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아담을 안식에 들어오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에덴 동산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이 시작되는 장소라는 뜻이 되는 것이며, 아담으로부터 그 하나님의 안식을 시작하시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중단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역할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안식이라면, 그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이루어 나가겠다는 의미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을 이끌어서 에덴에 두시었다는 말씀 속에는 바로 이 장소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시작하시겠다는 작정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시작하신 창조의 목적은 과연 어디까지 흘러갈까요? 네, 반드시 이루어지는 때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이제 좀 있으면 사탄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죄가 나타납니다. 자 그러면, 이 에덴 동산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멈춰질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반드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하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시면 이렇게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여,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말씀을 조금 더 정확한 번역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의 시작, 믿음의 창시자요, 또 그것을 완전하게 하시는, 완전히 이루시는 이 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이 창조의 안식을 시작하셨다면, 그것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 그 일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일을 이루어 내시는데 십자가가 동원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기쁨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은 에덴 동산과 뗄 레야 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에덴을 의하여, 그 에덴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사명: 에덴 성전의 제사장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담을 이 에덴동산에 두어 안식한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아담과 대단한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놀라우신 창조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안식하게 하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여기서 경작하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Abad” (עָבַד, H5647)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일하다”, “섬기다”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지키게 한다는 뜻으로는 “Samar” (שָׁמַר, H8104)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으나, 한 문장에서 같이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단어들을 사용할 때는 항상 무엇인가와 연관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이 민수기에 나타납니다. 민수기 3장의 내용입니다.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이렇게 나옵니다. 이 때 사용된 “시무하되”라는 단어에 바로 “Abad”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계속해서 8절로 넘어가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요.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여기에서 “맡아 지키며”라는 뜻으로 다시 “Samar”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었고, 성막에서 “시무할지니“라는 의미로 다시 “Abad”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경작한다”라는 단어와 “지킨다”라는 히브리 단어가 함께 한 문장 안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민수기 3장은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말씀일까요? 바로 성전 안에서 제사장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지요. 제사장이 하는 일이 바로 경작하고 그리고 지키는 일이라는 의미죠. 다르게 말하면 섬기고 지키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에덴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지금 그 성전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죠. 바로 하나님의 하늘 성전이 이 땅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아담을 불러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고 계신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생명나무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그 생명나무는 바로 하나님의 성소에 있었습니다. 계시록과 에스겔서에서 다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온다”,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물이 갈라지는데 거기에 생명나무가 있다”, 그리고 “그 생명 나무가 바로 생명수 강이 있는 어린 그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며 그 주위에 생명나무가 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된 제사: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적 예배
즉, 아담은 지금 하나님의 성전에 두어져서 하나님의 안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안식이 바로 제사장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안식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내용 중 일부를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이 창세기의 내용처럼 안식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내용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성소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성소로 무슨 일을 하러 들어가는 것이죠? 아담을 지금 이끌어서 에덴에 두셔서 무엇을 하게 하신다고요? 네, 바로 제사장의 일을 아담과 저희들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제사장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서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이 말씀은 단순히 베드로가 여러분과 저를 조금 띄어주려고, 우리들에게 과장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디어 이루어지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가 바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것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제사장인 줄을 모르고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면, 이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엄청난 손실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제사장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일 중에는 동물,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일도 있고, 아내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이들을 찾을 때 일어난 일들일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내용입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의 소리를 들었다”.
여기에 사용된 “거니신다”라는 Halak (הָלַךְ, H1980)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Halak이라는 단어가 이 구절에서는 yālaḵ (יָלַךְ, H3212)이라는 동사의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동사를 분사형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일이 한 번에 거친 일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된 일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거니 시다”라는 말이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기 위해 한번 동산에 내려오신 게 아니라, 꾸준하게 항상 그렇게 에덴을 찾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아담이 꾸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거니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주로 희생 제사를 지내는, 그 짐승들을 잡고 불태우는 직분을 맡은 자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제사장이 역할로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에덴동산에서 처음 제사장이 역할을 하게 된 이 아담에게 있어서는 죄를 속하는 제사가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한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전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는, 바로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죄가 없는 때였으니까요. 그러므로 그 제사장의 최고의 일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그분과 함께 거니는 일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그는 에덴의 제사장 이었던 것입니다. 기쁨의 제사장, 하나님과 동행하고 경배하고, 감사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살아가고, 그 모든 것으로 만족하고,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제사장 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지금 드리고 있는 제사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에서 설명하는 그 제사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려 거룩한 제사장이 될 지니라.”
이 신령한 제사는 짐승을 희생시키는 제사가 아닙니다. 이 신령한 제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야기했던 그 “영적 예배”, 우리 자신을 모두 드리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온전히 드리는 바로 그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에덴의 아담은 우리가 무엇을 다시 찾아야 하고, 무엇을 회복해야 될 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덴의 아담과 우리 사이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죄라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없어져 버린 것이죠. 이제는 죄 조차도 이겨 버린 그 회복을 우리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담이 마땅히 드려야 했던 기쁨의 제사, 사랑의 제사, 그의 모든 것을 드리는 신령한 제사를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한 드렸던 그 죽음의 제사, 피의 제사로 완성한 그 은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처음 창조된,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같이 되어 더 이상 피의 제사가 필요 없는, 신령한 제사를 바로 드릴 수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드려서 단번에 주의 제사를 마치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또 죄를 지어서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내 인생 전부를 주님 앞에 드릴 것인가, 나의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미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살 것인가 하는 것들 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실패할 수 있었고,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의 제사, 사랑의 제사 그것을 위해서 피의 제사를 그리스도께서 드리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실패할 수 없는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고 섬기는 제사장의 삶
여러분, 아담은 성전을 지키는 자 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그 사랑의 관계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깨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성전을 지키는 자의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된 것은 물론 감사한 일이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생각에는 단순히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그런 쉽고 간단한 일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기도라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까지, 실로 아주 많은, 어마어마한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도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실로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서 주님만 부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니까 그 하나님이 마치 우리 기도를 당연히 들으신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친밀함을 방해하는 것, 그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죽이는 일을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계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그 성전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것, 이것은 어찌 보면 꽤 거창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성전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것들은 참으로 소소한 것들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게으름과 싸웁니다. 성경을 결심하고 읽으려고 하면 꼭 전화가 걸려옵니다. 오늘 저녁에는 가족들이 모여서 가정 예배를 드리기로 작정을 했지만 저녁을 먹고 좀 쉬다 보면 꼭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생각이 나지요. 저도 그렇게 생활할 때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것들을 우리의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게으른 본성들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약간은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가끔 설교할 때 제가 여러분께 하나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고 읽읍시다라고 했을 때, 어떤 분은 그 말씀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성경 읽기 결심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지요. 내가 자발적으로 읽으려고 결심했는데 목사의 권유에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적당하면 회개하기 보다는 주로 반발을 하게 됩니다. 지적당한 사실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비슷할 것입니다. 이런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자존심이 바로 죄의 근본적인 모습일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으로 등장할 때가 우리 일상에서는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힘을 내지 않는 것 역시도 게으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의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일이라는 것은 정말 간단한 것입니다. 오셔서 예배하고, 다시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뭐가 더 있겠습니까?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하고, 그리고 서로 교제하고 집으로 돌아가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예배당 구석구석 마다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 편하게 앉아서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의자들 누가 놓았을까요?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는 절대로 응답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이 이 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동참하기를 항상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여러분과 저에게는 커다란 유익이니까요. 이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누군가의 손길과 땀이 있었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예배 후에 예배당에는 언제나 쓰레기가 생겨나고, 청소할 일이 생깁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르쳐야 될 자녀들이 있고, 여러분께서 기도해야 할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찾으려고 하면 가장 일이 많은 곳일 것입니다. 성전을 섬긴다는 것은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성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소홀히 하게 되면, 우리는 편하게 예수를 믿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이 그 일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실 일들을 멈추실 분은 아니시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그 일에 동참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와 영광과 거룩과 기쁨 또한 놓칠 수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사가 필요한 곳에 나의 실력도 필요하지만, 나의 격려도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하여 내가 한번 위로를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시면 그것을 억누르지 마세요. 그분들은 위로와 감사가 필요합니다. 교회를 위해 항상 수고하는 어떤 분들이나 구역장님들이 생각나신다면, 그 마음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 감사의 마음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격려와 칭찬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사장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고 돌보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기업: 하나님 자신
마지막으로 제사장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여러분께 드리는 위로는 이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무엇으로 살았나요? 제사장이 속한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이 없었습니다.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제사장인 우리에게도 약속하십니다. “너의 기업은, 너의 재산은, 너의 모든 것은 바로 나, 하나님이다.” 여러분의 힘은, 여러분의 모든 근원은, 여러분이 이 땅을 살 수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기업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제사장입니다.
마침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에게 허락하시는 그 은혜가 놀랍고 또 놀랍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의 자리에 서게 해 주셨으니, 과연 우리가 제사장같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이며, 즐거움을 얼마나 큰 것인지도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 내가 제사장이기에 나의 힘이 무엇인지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영원하신 기업, 하나님이시여. 나의 생명보다 귀하신 주님이시여.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오니 그 주님께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