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76-여호와 이레 (3)-이제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1절로부터 14절 까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멘.
아브라함의 시험과 '여호와 이레'의 고백
지난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세 가지 준엄한 명령이자 시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를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라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그를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은 간결하면서도 깊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시고, 이해하시며, 돌보실 것이다." 즉,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살피시고 준비하신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고백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제야'에 담긴 깊은 의미
본문은 11절,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으로 시작하여 12절의 마지막 구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로 마무리됩니다. 이 구절을 접할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그전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그분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하시다가,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경외심을 깨달으신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제야'라는 단어가 그러한 시간적 의미를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야'로 번역된 히브리어 성경은 두 단어, 즉 '키(כי)'('왜냐하면')와 '아타(עתּה)'('지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for now'에 가깝습니다. 'till now'나 'from now'와 같이 특정 시점까지 또는 특정 시점부터의 시간적 의미는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냐하면 지금 네가 나를 얼마나 경외하는지 내가 알기 때문이다"라는 현재의 명확한 상태를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더욱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제' 또는 '지금'으로 번역되는 'now'는 단순히 시간의 한 시점을 뜻하는 것을 넘어, 본문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이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펼쳐 보일 터이니, 여기에 있는 것이 얼마나 분명한지 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그전까지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다가 이삭 사건을 계기로 갑자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지체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했죠. 이는 아담 사건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반응입니다.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며, 믿는 자의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삭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셨던 모든 인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명백히 드러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오랫동안 응축되었던 것이 폭발하듯,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제야(명백하게) 내가 알게 되었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한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의 진정한 의미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들으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것', 혹은 '내 말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알겠다'와 같은 표현이 더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들으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알겠다'와 같은 표현이 더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단어는 창세기에서,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 처음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이처럼 이삭 사건에 성경 전체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단어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지닌 신학적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경외'는 우리가 잠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암송하듯 익숙한 구절처럼 단순히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잠언의 구절이 지혜와 지식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가르치지만, 아브라함이 잠언서가 기록되기도 전에 이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경외'는 기본적으로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간단해 보이나, 아브라함의 인생 전체를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는 어디에서 이토록 깊은 경외심을 배우고 이를 삶으로 증명할 수 있었을까요?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친히 가르치신 셈입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하나님 경외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왜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셨을까요? 제가 이 단어에 처음 주목했으며, 여러분 또한 주목하시기를 바라는 이유는 바로 그 단어의 시작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너무나 단순하고 잘 알려진 단어처럼 들리기에, 우리는 흔히 '그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지난 인생과 연결하여 숙고해보면, 이 단어가 그의 삶 속에서 얼마나 중대한 의미로 시작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하나님의 은혜
사실 아브라함의 인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하란에 머물던 아브라함 또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에서 아브라함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아브라함의 삶 속에 아로새겨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침공해왔을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지켜 승리케 하셨고, 롯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지켜주셨습니다. 아비멜렉 사건에서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으며,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남는 것: 오직 하나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돌이켜보면, 이 모든 순간들이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였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과 연관 지어 설명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나를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병상에 있을 때도 나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이와 같은 소중한 경험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단어가 그의 삶을 압축하는 핵심 표현으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에 걸려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내놓으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이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인생, 그가 받았던 수많은 은혜들, 심지어 약속으로 받은 아들 이삭조차도 기꺼이 포기하라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으로 주신 응답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들, 남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체험들, 기도 중에 누렸던 기쁨들, 성경을 공부하다가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들까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내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없었던 일로 하자"는 말씀인 셈입니다. 만약 그 모든 것을 버린다면, "너에게 무엇이 남을 것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들, 약속까지 모두 지키시며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아들까지 주신 그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요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목사로서 이 교회에서 오랜 세월 목회하며 겪었던 고생,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라. 내가 너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내놓으라" 하신다면, 여러분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단어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에게 남은 유일한 단어는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셨던 이삭을 빼앗아 가셨을 때, 그것을 내놓고 번제로 태우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왜 약속하신 것을 가져가십니까? 하나님,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고 보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것도 허락하셨고, 아플 때도 기도에 응답해 주셨는데, 왜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맞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아니라 저에게 남는 것은 하나님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달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저에게 무엇이 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순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마저 거두실 때 남는 것: 욥의 고백
나를 친히 돌보시고 한결같이 사랑하셨던 하나님,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던 하나님. 심지어 그 언약마저도, 하나님이 행하신 그 약속마저도, 그 약속으로 이루어진 응답마저도, 나아가 내 눈앞에 펼쳐진 구원, 내가 받았다고 확신하는 그 구원마저도 하나님이 내놓으라고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천국마저도 "이제 너에게 줄 수 없다, 내놓으라" 하신다면, 여러분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욥기서에 나오는 욥의 고백을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 안에 나의 소망을 두리라."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이제까지 너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준 구원이라 할지라도, 너희가 그 구원을 얻은 뒤에도 나를 공경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내게 가까이 오지 않고, 진심으로 예배하지 않으며, 그저 너희 욕심과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구나. 그러므로 내가 모든 구원을 취소하겠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구원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러분에게 과연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때 여러분에게는 욥과 같은 고백이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육신의 보이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다 빼앗기더라도, 저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께만 남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저를 모른다 하실 때라도, 제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남습니다."
아브라함 이레, 나의 이레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실제로 그렇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실 리도 만무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놀라운 고백은 그가 이제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께서 나를 보신다'는 이 말씀이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이루어졌을 때, 이는 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브라함 이레'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만을 바라보실 때, 여러분과 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시선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레'라는 단어는 이제 여러분 각자의 단어가 됩니다. '나의 이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레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모두의 이레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이름 뒤에 '이레'라는 말을 기꺼이 붙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의 참된 의미
나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찾고, 그분의 귀한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 그 놀라운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며 깨닫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깊이 알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가 나의 모든 관심이자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분께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갈망합니다. 그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내게 무엇을 부어주셨는지, 오늘도 나와 어떻게 함께하시는지, 그리고 나를 위해 왜 눈물로 기도하시고, 왜 한숨 쉬시며, 답답해하고 근심하며 걱정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오직 하나님만 남은 그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빼앗겼을 때, 심지어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 친히 그것을 가져가셨을 때라도, 여러분이 만일 그 상황에서 "하나님, 그 모든 것이 다 없어져 저를 죽이실지라도 저의 모든 마음과 소망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때 여러분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내가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이처럼 웅장하게 요약하신 것입니다. "그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 안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에게 왜 하나님만이 남았으며, 아무것도 없이 이삭까지 희생해야 했던 그의 인생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재로 나아갔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러분, '경외한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핵심적인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너희가 세상을 두려워할 것이냐,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냐?"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 땅이나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의 최우선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 '경외'라는 단어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아브라함의 인생과 결코 동떨어진 말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이삭이 아니었고, 그가 받았던 수많은 선물들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 우리의 인생
사무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사무엘상에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하게 섬기라." 여러분이 '경외', 즉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의 뜻을 성경에서 찾기 시작하면, 가장 많이 마주하는 진리 중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우리는 그분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인생,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일들로 가득 채우신 분입니다. 쉽게 말해, 아브라함의 인생은 단순히 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 삶으로 불립니다. 여러분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단순히 '내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이 말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가거나, 혹은 많은 병으로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길이가 어떠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높은 자리에 있든 낮은 자리에 있든, 모든 것을 잃고 배신당했든, 아니면 모든 것을 누리고 있든, 이 모든 순간들이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큰일이 됩니다. 다시 말해, 신자에게 '별 볼일 없는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크고 위대한 일들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인생
바울은 이 진리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여러분 모두가 보배로운 존재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보배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그 보배를 어디에 담고 있다고 했나요? 바로 질그릇에 담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아닌, 깨끗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에 대해 비유했지만, 이 구절은 그 맥락과는 다릅니다. 여기서는 오직 '질그릇'만이 강조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도 질그릇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실패한 듯 보이며, 심지어 스스로도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 자조하는 삶조차도, 역시 질그릇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을 호령했거나 위대한 이름을 남겼다 해도 그는 질그릇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왔다가 조용히 사라진 이들도 질그릇입니다. 그들이 귀한 이유는 그들 자신의 인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담고 있는 '보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바로 그 보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 중에 보배롭지 않은 인생이 과연 있을까요? 아직 그 확신이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듯합니다.
목사의 말에 이끌리듯 동의하지만, 여전히 깊은 확신은 없는 듯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을 주신 것도,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내놓으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의 큰일이었기에, 그의 인생은 온전히 하나님의 위대한 일로 채워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의 삶에서 그 어떤 순간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아팠던 순간들, 심지어 자신의 거짓으로 얼룩졌던 순간들조차도, 단순히 괴롭거나 기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큰일로서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질그릇 같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입니다." 나는 위대하지 않고, 내세울 것도 없으며, 사람들이 내 인생을 아무리 뒤져봐도 위대한 것을 찾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나의 삶에 대한 전기가 단 한 줄, '나는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을 살다가 몇 년도에 죽었다'로 끝날지라도, 나의 인생은 가장 보배로우며 가장 귀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인생, 우리 모두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로 인해 귀한 인생이 되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앞에서 읽은 것처럼, 하나님의 큰일을 내 인생 속에서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방금 '아멘'하며 '그렇습니다, 내 인생이 보배로운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한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귀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오직 바라보고 있기에, 나의 '이레', 즉 내가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여러분이 신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며, 우리는 다음 주에 그 믿음과 행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연약함 속의 강함: 하나님의 큰일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의 연약함조차도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 때 능력이 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의 약점이 갑자기 강점으로 변한다는 피상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펼쳐지기에, 여러분은 그 안에 담긴 보배로 인해 강한 자가 된다는 심오한 진리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았을 때, 그는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로 설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경은 놀랍게도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이 구절은 우리가 이제껏 하지 못하던 일도 예수만 믿으면 모두 가능해진다는 뜻일까요? 시험에 계속 낙방했던 사람이 예수를 잘 믿으면 시험을 잘 보고, 변변찮은 직장에 있던 사람이 예수를 잘 믿으면 더 좋은 직장으로 무조건 옮겨간다는 의미일까요? 안타깝게도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그러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저 역시 간절히 바랍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
여러분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아마 목회자만큼 마음의 갈등이 심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게 병 고치는 강력한 은사가 임했으면 좋겠다. 한 번 기도해서 모든 병이 낫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들곤 하죠. 성도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 모든 장로님들뿐만 아니라 구역 식구들도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일 당장 어디선가 그 직장을 예비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간증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그것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성경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일까요? 성경은 오히려 우리 삶 속에서 왜 능치 못함이 없느냐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그 위대한 일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기만 한다면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저 한 줄짜리 연대기나, 살다가 무덤 속에 묻히는 평범한 삶이 아니라,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고 육신도 마음도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적인 인생이 아니라, '나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내 삶을 관제(灌祭)와 같이 온전히 붓기를 원한다. 하나님 앞에 나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인생이 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에 위대한 일을 더 행했기 때문에 관제와 같이 드려지는 제물이 된 것일까요? 그가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더욱 멋지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어쩌면 평생 해왔던 대로 그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옆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간절히 호소하며 그의 삶을 마지막까지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러다가 잡혀 순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관제와 같이 드려지는 제물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
여러분, 바울의 인생 자체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었기에 그의 삶이 빛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크고 놀라운 일(비록 우리 자신은 그 깊은 의미를 다 알지 못할지라도)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짓을 행했던 그 순간조차도, 하나님은 그 속에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사라가 웃으며 '하나님께 어찌 아들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던 그 불신의 순간을 히브리서는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그가 믿음으로, 사라가 믿음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그녀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죽음마저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볼 때 부활의 소망이 되었음을 지난 시간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한 선교사의 고백: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
여러분,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며 깊이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내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아 가셨을 때, 과연 하나님만 내게 남을 것인가?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남아 있기에 내가 그분을 경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찬송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원래 오늘 마지막 찬양은 시편 63편이었습니다. 이유정 씨가 작곡한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라는 찬양 말입니다. 제가 마지막 찬양을 바꾼 이유는 이 찬양을 모르는 분들이 계셔서, 예배 중에는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익숙한 찬양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찬양팀에 몇 번 더 연습한 후에 부르자고 부탁드렸죠. 시편 63편을 최종 찬양으로 정해 놓고 '이걸 해도 될까?' 하고 찬양 인도자들에게 몇 차례 물어봤는데, 아직 모르는 분들이 좀 계실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다른 찬양으로 교체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께 온 메일이었는데, 그 목사님의 24살 조카가 싱가포르 근처의 한 나라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며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 사역을 감당하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져 진찰한 결과, 뇌막염 진단을 받게 되었고, 현지 병원 시설이 미비하여 싱가포르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뇌막염으로 인해 코마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과 함께 기도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기도 부탁 메일에는 선교사 자매의 여동생이 쓴 편지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선교사 자매는 24살이고 여동생은 그보다 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읽을 때, 저 자신도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며, 눈물과 열심, 복음에 대한 열정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부끄럽게 만드는 편지였습니다. 편지 전체를 다 읽어드리고 싶지만, 한 부분만 잠시 나누겠습니다.
"사랑하는 기도의 용사들에게," 자매의 이름은 사라입니다. 현재도 코마 상태에 있는 사라 자매가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기도의 용사들에게, 이제 사라의 생명 유지 장치는 10시간 후에 멈추게 됩니다. 이제 이 땅에서 사라에게 기적과 생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에서 그녀는 하늘 아버지 품에서 더 큰 기적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편에 서서 사라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사라 자매와 그녀의 동생, 그리고 그 가족 모두가 사실 선교사 가정입니다. 부모님도 우즈베키스탄에서 15년에서 20년 동안 선교하신 분들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선교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자신 또한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지만, 그 편지 뒷부분에 이렇게 나옵니다. "사라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과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는 것: 오직 하나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모든 것을 벗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 남은 유일한 존재를 여러분도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설령 내 삶이 여전히 연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에게 남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며, 나의 인생을 그분과 함께 그분을 사랑하는 데 바치리라" 고백할 수 있다면, 이 시편 63편의 고백 또한 온전히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시편 63편: 다윗과 한 목사님의 고백
시편 63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이 63편에 대해 묵상하다가 놀랐던 것은, 앞서 편지를 보내주셨던 목사님이 뒤에 코멘트를 달아 두 번째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은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아이를 낳은 지 55일 만에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으셨던 분입니다. 그때 본인이 겪었던 일과 심정,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되셨는지를 이야기하며 조카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특히 그때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았던 성경 본문이 시편 63편이라고 적어 주셔서 저 또한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편 63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지금 다윗은 황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말 그대로 인생의 광야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마실 물 한 모금 없는 메마른 땅에서 그는 주를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주를 갈망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그의 마음은 광야처럼 황폐했으나, 그가 있던 곳은 예루살렘, 성소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찾고 바라보며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를 갈망했습니다.
생명보다 나은 주의 인자하심
다윗은 이어서 놀라운 고백을 터뜨립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은 히브리어 '헤세드'로, 하나님의 언약에 기반한 진실한 사랑과 은혜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 선 듯한 절박함을 느낍니다. 갈등과 아픔, 고난으로 인해 차라리 모든 것을 끊고 이 땅에서 사라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간절히 생명을 갈구합니다. "내 육체가 주를 갈망합니다." 다시 일어나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나으므로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생명이 사라진다 해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없어져도, 나라는 존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인생을 마친다 할지라도,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 할지라도, 주의 인자는 나의 모든 인생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도 남으며, 그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기에,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라고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삭, 아니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져가신다면,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리고 그 남은 존재가 여러분에게 누구이며, 여러분은 그분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를 찬양하나이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이 고백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믿으셨기에, "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그 고백이 바로 저희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주의 신실하심이,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모든 것보다 더 좋습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의 뜻을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바로 우리의 인생임을 깊이 깨달아, 우리 또한 그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