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강해 설교집/창세기 강해

창세기-11-하나님의 형상 -다스림

lampchurch 2025. 4. 17. 09:02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26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함께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아멘.

 

여섯째 날의 특별함

여섯째 날은 굉장히 특별한 날입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리고 영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들은 관사가 의미 전달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명사 앞에 관사를 붙이면 그 대상을 매우 특별하게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명사 앞에 관사를 붙이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 하나님, 혹은 “그” 그리스도, “그” 예수와 같은 강조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여섯째 날에 관한 설명에서, 이제까지 나왔던 다른 날들과는 다르게 '그 여섯째 날'이라는 단어 앞에 관사가 특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여섯째 날이 아주 중요한 의미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워낙 큰 범위의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다루었지만, 오늘뿐만 아니라 창세기 2장을 공부할 때에도 계속해서 등장하게 될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복습: 관계성

우선 본문을 따라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우리”라는 단어였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으므로, 그 “우리”라는 말 안에는 관계성이 존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사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먼저 출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아뢸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존재가 되어 주셨습니다. 시편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성경에서 우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말 못 하고, 듣지 못하는 신이다.” 바로 우상을 일컫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나의 형상대로 귀를 만들어 너희를 듣게 하였다면, 내가 어찌 듣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표현인지요? 우리가 듣는 것처럼,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하나님이 듣고 말하시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소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의미로 살펴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아뢴다는 의미는 우리의 모든 자신을 하나님께 보인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원리에도 당연히 적용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뢴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필요한 것만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인격 전체를 하나님 앞에 보여 드리고 또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의 가장 중요한 핵심도 이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우리 자신을 준다” 혹은 “하나님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라는 말을 왜 사용할까요? 이 말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당신 것이다”, “당신은 나와 함께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다”, 혹은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주겠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의 표현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행위가 바로 우리가 주님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님께 조르는 것만이 아니고, 혹은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을 주님께 모두 털어놓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은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순종은 바리새인들이 훨씬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단순한 순종이나 복종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서는 이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는 선언입니다. 무엇인가를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동을 하는 이유에 사랑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 사랑에 따라서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며, 내가 얼마만큼 정확하고 잘 알고 있는지, 혹은 얼마만큼 잘하고 있으며 깨끗한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됨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는 '우리'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며, 이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서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그 안에서 누리고 계시는 그 관계는 비록 여러분이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이루고 계시는 완전하신 교제라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친한 친구와도 적어도 한두 번 이상은 그 우정이 삐걱거려본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와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간에서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무수히 많았을 것입니다. 단지 뒷일이 걱정되어서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한 경우는 있었어도, 적어도 속으로는 아마도 여러 번 헤어질 결심을 했다가 다시 거둔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누리시는 그 관계의 완전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충만한 만족을 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말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떠나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죠.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은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지난주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 바 있는 '남과 여'라는 복수가 의도적으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남과 여라는 복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 목적을 잘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고백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말의 의미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내 뼈 중의 뼈라는 말, 그리고 내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저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하나가 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 더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 관계가 창조와 함께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입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니”.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즉, 그들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아버지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 후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나요?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우리끼리는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끼리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분명히 있고, 그 사람을 우리는 나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로 여기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그들을 예수님 안에 담으니까,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 담으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착해져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성숙해져서 우리가 하나가 된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나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 된 자로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제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이제 배워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하나됨의 목적: 그리스도를 증거함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가 되게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하나가 되기 어려운 우리를 교회라는 몸으로 부르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런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차라리 집에서 따로 예배드리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요. 많은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팬데믹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만 예배드린 후로는 사람들과 부딪힐 일도, 시험받을 일도, 그래서 속상할 일도 없으니 너무 편하다고요. 앞으로도 이렇게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가끔 만나서 교제나 나누면 참 편할 수도 있을 거라고요. 일리가 있는 말이죠? 저도 솔직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설교만 하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로 묶으셔서 이렇게 꾸역꾸역 교회로 오게 만드시고, 내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며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때로는 피해서 도망 다니기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우리를 그렇게 하나로 묶으시는 그 이유를 요한복음 17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하나가 되게 한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처음 들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강권적으로 하나로 만드신 이유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며, 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하나로 묶이면 항상 서로 원수같이 싸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교회에 와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속상하고 답답한 일들과 직면하면서까지 하나로 묶여야 하는 이유를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그런 모습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이기 위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여러분과 저는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존재인데, 오신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수처럼 보이는 사람을 위해 용서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끼리 이 모든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가 없었겠지요. 예수께서는 불가능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묶으심으로써, 예수 없이는 이런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답답하고 속상한 가운데서도, 공동체의 개개인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참아내고 그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한 번 더 예수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됩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시작될 수도, 완성될 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도 우리의 잘난 맛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 은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고 얼마나 잘난 사람이 되었는가를 항상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당에서 이렇게 함께 예배하고 또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과 사랑을 나눌 때, 여러분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금이라도 선한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나를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기도하고 섬기게 만드시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나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 자녀 양육의 예시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옛날엔 그냥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뛰어놀고 저녁 시간이 다 되면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고, 집에 가서 식구들과 식사를 하고 숙제하고 잠이 드는 그런 단순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크게 아이들이 부모를 걱정시키거나 속을 썩이는 일이 많이 없었지요.

 

요즘은 어떤가요? 요즘 부모님들은 하루 종일 아이들과 전쟁을 합니다. 왜냐면 아이들이 거의 하루 종일 붙잡고 있는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하는 게임이죠.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의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오직 화면 속의 게임에 집중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부모들이 이 게임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집에서는 아이들을 다그치기도 하고, 상을 걸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빼앗고, 인터넷도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스스로 통제하기는 힘든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적절한 의견 조절이 힘들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교육시키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어떤 모범적인 가정은 부모와 아이가 서로 노력하면서 서로의 요구를 조절하며 조금씩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아이와 부모 사이의 갈등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하나씩 사용해 봅니다. 이러한 방법의 주된 목적은 단순합니다. 아이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함이고, 부모는 또 부모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뭔가 빠진 것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아이와 부모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정작 거기에서 하나님이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물음이 빠졌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속상한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자신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아서 생길 수 있는 자녀들의 많은 불이익에 대해서만 집중합니다. 아이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게임을 통해 아이는 친구들과 사귀고 게임을 잘 함으로써 자신이 인정받는 것을 즐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두 관점 모두가 우리가 처음 말한 하나님을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되더라도 내가 자식들을 잘 교육한 부모라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아이를 교육했으며, 그 결과로 아이가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인터뷰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모든 아이를 가진 가정에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문제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이 땅에서 증명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방법대로 문제를 잘 해결하고, 그것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지어졌고, 인간의 일은 너무나 다양하므로, 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욕심으로 가득 찬 존재이므로, 자식을 여전히 내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아이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이를 증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지 않고서는 그 자녀를 인내하며 함께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포기가 안 되는 내 욕심과 왜 내가 싸워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교육시키는 것이 어찌 보면 그렇게 대단한 문제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자칫 가볍게 여기면 큰 실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세상적 바람만을 만족시키는 것은 분명히 큰 욕심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증거가 목표인 삶

우리가 서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고, 서로 평화하고, 서로 화목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칭찬하는 것,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선한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저의 목표는 평화나, 화목이나, 이해나, 칭찬이나, 격려나, 혹은 여러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목표를 두시면 여러분은 잘못 생각하고 계실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이 추구할 목표는 '내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해 내겠다'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하고 잘못하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우리가 스스로 화평하고 화목하고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높이며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자라고 칭송받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목표로 해서 사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이를 추구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모든 고등 종교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유교도, 심지어는 이슬람교도 인간이 선하게 살기를 추구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그 목표를 화평과 화목과 이해와 기쁨과 즐거움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추구하면서도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다고,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고, 비록 여전히 남을 용서하지 못해서 속상하고 답답하지만 이것이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고, 세상에 증명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래서 다시 회개하는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증명하는 것, 성령님께서 오늘도 내 안에 살아계셔서 그 은혜로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을 매일 고백하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얼마나 행복한지가 목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내가 아내와 혹은 남편과 깊은 불화를 겪고 있으며, 자식과는 많은 갈등 속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면,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바로 보게 되었다면, 그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여러분의 그 고백이 이 땅에서 하셔야 할 여러분의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다스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산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한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순종한다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우리의 부족함과,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회개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잘하고,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한다면 회개하라는 말씀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바로 그것 때문에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창조에서 드러난 “우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땅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다스림'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쉽게, 겸손을 통해서나 섬김을 통해서, 혹은 이웃에 대한 구제나 베풂을 통해서 신자와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을 '다스린다'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다스린다는 표현은 굉장히 어렵기도 하지만 중요한 표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스린다’는 말을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보면, “보살피다”, “관리하다”, 그리고 “통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힘”을 전제하는 표현입니다. 정부가 국민들을 다스린다는 말은 공권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다스린다는 말은 부모로서의 힘과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부 힘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될까요? 오늘 읽은 말씀 28절에서 26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설명하십니다. 26절에서 사람을 만들고, 각종 동물과 물고기들을 다스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고,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는 그 내용이 좀 더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문장의 구조를 본다면 26절에 있는 말씀을 28절에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만드시기 전에, “자, 이렇게 만들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28절에는 “생육하고 땅에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라”라고 하시며 그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스리라'는 말 안에는 바로 이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려라”는 세 가지의 의미가 같이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다스린다’라는 말씀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다스림의 의미 (1): 땅에 충만하라

그러므로 ‘다스린다’라는 말에 들어가는 첫 번째 의미는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이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힘을 가진 인간이 우월한 존재로서 그 동물들과 짐승들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이들을 잘 관리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선 땅에 충만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전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구절에서 짐승들에게도 “땅에 충만하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에 기는 짐승들이 부분적으로는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해와 달을 만드실 때도 그 광명체로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이것도 역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3일 동안 만드셨던 이 그릇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실 때, 하나님이 그 그릇에 담는 것들이 그 그릇들을 다스리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에게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 모든 생물체에게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스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 어떻게 '땅을 다스리라'는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땅에 충만해서 번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신 창조의 영광과 그 하나님의 능력을 땅에 충만하게 보여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자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게 되면, 그 사자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충만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번식이라는 “Multiplication”이라는 단어에는 개체의 수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뜻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해서 늘어나니까 그 영광이 계속해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자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에게는 개체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함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물을 다스릴 때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힘도 사실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호랑이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을까요? 호랑이보다 더 강력한 팔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몸집이 코끼리보다 더 컸을까요? 아닙니다. 힘이 더 강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 만들어진 인류였기 때문에 슈퍼맨처럼 엄청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그때에도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들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명령을 통해 모든 만물이 충만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창조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하게 통솔력을 지닌 사람, 특별하게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특별한 어떤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다스리는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고, 이 복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스린다는 말은 만물을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힘이 아니죠.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고, 그로 인해 그 영광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그리스도가 오신 오늘날로 말하면, 이것은 복음의 증거와 복음의 충만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죠.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됩니다. 새 창조의 영광이 충만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게 되면, 단지 우리 하나가 예수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나라가 그 순간 드러나게 되고,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일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그 다스리는 일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게 되니까요. 그러므로 타지에 나가서 섬기시는 선교사님은 물론이지만 우리들도 이러한 의미에서는 다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 중에 선교사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죠. 그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증거하는 자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곳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땅에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스림의 의미 (2): 땅을 정복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그 강한 의미로 인해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 힘을 이용해서 나아가는 종교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말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고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때 세상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세상의 땅은 다 누구의 것이었나요? 그때 정복할 나라가 있었나요? 정복할 적들이 있었나요? 그때는 이 모든 땅이 다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땅을 하나씩 하나씩 빼앗아 오라는 뜻이었을까요? 아니죠!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복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이 ‘정복한다’는 말에는 그것들을 자기의 권한 아래로 들여와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과연 그때 아담과 하와가 다스리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눈 밖에 있어서 그것들을 다시 하나님 안으로 복종시켜야 할 것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에서는 당신이 직접 힘으로 눌러서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굴복시킴에 해당되는 말도 아닌 것입니다.

 

그럼 이 '정복'이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땅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로 충만하게 될 때, 그것이 자동적으로 개체 수만 늘어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냥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이 정복되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실제 상황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을 땅을 정복한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론 지금도 믿고 계시죠. 그런데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돈을 벌고, 밥을 먹고, 그리고 내가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모든 일들, 그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버는 일도 우리는 자주 먹고 사는 일과 혼동하여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은퇴하신 어르신들은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셔야 하므로 지루하거나 답답했을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루하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지루함이 여러분의 감정과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답답함으로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서 지루하지만 행복하다고 고백해 보신 경우는 많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게 된 자신이 너무 기뻐 하나님께 감사해 보신 분은 많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여러분의 그 쉬고 계시는 인생에서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지적해서 여러분이 잘못했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는 언제나 받고 있으며, 여러분이 쉬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통치가 우리의 실제적 삶에서도 우리에게 누려지는 것,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을 정복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누구의 땅이었나요? 여호수아가 남의 땅을 정복한 것이었나요? 아니죠.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면 자기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전쟁 자체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사사기에서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그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를 않았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 고생을 하게 된 것이었죠. 아이들이 하는 말로 개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성도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정복한다는 말은 바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또 드러나는 일,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일,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잠이 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밥을 먹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불평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삶 속에서 불평할 것이 생기고,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시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스리는 주가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로 인해 나의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어 주심에 감사하고, 그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로 인해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의 정복과 자유

과연 이것이 쉬울까요? 네, 어렵습니다. 쉽지가 않지요. 그래서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죄의 정복과 관계가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게 되는 것이지요.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죄를 정복하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땅에 충만하라'는 말이고,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와 싸우기 위해서 항상 죄만을 생각하고, 이 죄와 어떻게 싸우고 이길 것인가만을 하루 종일 생각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그 죄와 닮아가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을 죄가 지배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한 자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기쁨으로 삶을 누려야만 우리는 비로소 죄와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내가 죄에게 질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내가 이미 죄에게 승리한 자라는 것을, 죄가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죄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사탄이 우리를 향해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는 그 사탄과 죄를 향해 더 크게 웃어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나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확신이 바로 우리의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작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죄와 싸울 수 있게 됩니다. 죄를 정복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붙잡고 울 수 있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쓰러지면 나를 품에 안아 주실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흔들리면 그 흔들리는 손을 꽉 잡아 주시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품에 안겨서, 그 무릎 위에서 울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약함으로도 죄와 싸울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에게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멋있는 위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죽음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놀랄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이었을 때 구원받은 그 은혜보다 더 놀라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제 주님 안에서 정말 참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죄에 매여서 죄와 싸우지 마십시오. 죄를 이겼기 때문에 죄와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악물고 매일 신음하지 마시고, 죄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싸우십시오. 그래서 기쁨으로 이기십시오. 선으로써 악을 이기십시오.

 

다스림을 누리는 삶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땅을 충만하게 하고,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늘어나도록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내 삶으로 보여주게 되고, 그 안에서 죄를 정복하고, 참 기쁨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는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그렇게 죄를 이긴 자요, 그렇게 죄를 정복하는 자요, 그리고 또 그렇게 자유를 누리는 자입니다. 저희로 하여금 이 땅에서 그 복음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놀라운 영광을 누리게 하셔서 그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저희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깨닫게 해 주십시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며, 아무리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를 누를 수 없다는 것, 이 죄를 정복하신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저희로 이 세상에서 힘을 얻어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