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강해 설교집/창세기 강해

창세기-73-영원하신 하나님

lampchurch 2025. 7. 19. 04:42

하나님 말씀 창세기 21 말씀입니다. 창세기 21 22절에서 34절까지 말씀입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아들과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손에서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우물 증거를 삼으라 하고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아멘.

 

아비멜렉의 두려움: 이방인의 고백

, 우리는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 들어가 아비멜렉을 만났던 사건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말했었죠. 아마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번째 만남입니다. 이번 만남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개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아비멜렉이 처음 말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였습니다. 굉장히 신앙인 같은 말이죠. "네가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비멜렉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이방인입니다. 물론 아비멜렉의 눈에도 아브라함은 이방인이겠지만,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말이 아님을 있습니다. 게다가 상황을 깊이 살펴보면, 아비멜렉이 혼자 아브라함을 만나러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군대 장관 비골,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을 대동하고 왔습니다.

 

아마 사람만 것이 아니라 호위 부대도 함께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외교 장관이나 아브라함과 가까운 사람을 데리고 가는 일은 있을 있지만, 군대 장관을 데리고 온다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무언가 요구할 의도가 있었으며, 단순한 평화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외압을 가하거나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에게는 훈련된 종들은 있었지만 군대라고 만한 조직은 없었습니다. 그는 부족의 족장이었을 뿐입니다.

 

아비멜렉이 맹세를 요구한 이유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2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죠. "너는 나와 아들과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땅에서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너와 너희 자손이 내가 너희를 후대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후대하겠다고 약속해라" 하고 말이죠. 여기서 '후대'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후하게 대접한다' 의미가 아니라, 사실 우리가 아는 '헤세드'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베풀었다' 뜻입니다. ,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나와 자손에게 은혜를 베풀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비멜렉의 위치와 아브라함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요구는 이상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말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우리 자식들 이삭과 후손들이 여기서 살게 테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말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나라의 왕이고, 아브라함은 나라에 들어와 방랑하는 유목 민족의 족장입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뭐가 부족해서 그랬을까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비멜렉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러니 나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말입니다.

 

말은 앞으로 여러분이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삭, 야곱, 요셉에게서도 계속 만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아비멜렉이 말을 하면서 중요한 의미와 사건들을 담고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비멜렉과 관련된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사라 사건입니다. 사라 사건을 보면 아브라함이 잘못을 했고, 아비멜렉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보호하시고 아브라함을 지켜내셨습니다. 가지가 아주 분명하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편드시는 하나님이지, 자신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을 아비멜렉은 보았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인지를 아비멜렉은 알게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역사

여러분, 사라 사건 이후에 성경에 기록된 가장 사건은 100 아브라함이 90 사라에게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은 사건입니다. 이것은 아마 당시에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뉴스거리였을 것입니다. 아비멜렉도 이야기를 들었겠죠. 그런데 아비멜렉에게 사건은 단순히 나이 부부가 아들을 낳은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라 사건 , 아비멜렉의 집안에 태가 닫혀 자식이 없게 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도했더니 태가 다시 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아비멜렉에게는 보통 이상의 놀라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있었습니다.

 

게다가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단순히 유목민의 신분을 넘어 한곳에 정착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광야 지역에서 우물을 7개나 팠습니다. 유목민들은 물과 초장을 찾아다니며 살지만, 우물을 파는 행위는 그곳에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블레셋 일부에서 양과 소를 먹여도 좋다고 허락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브라함이 우물을 여러 파고 양과 , 그리고 모든 재산이 늘어나자, 아비멜렉의 눈에 아브라함은 지역의 토호, 조선시대로 치면 사대부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을 마냥 축하만 해줄 없는 상황이었죠.

 

이제 아비멜렉은 불안해졌습니다.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대를 잇게 하신 하나님께서 언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자신들의 태를 닫으실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고대 국가에서 후사가 없다는 것은 나라의 멸망을 의미했습니다. 자신의 집안의 태를 한순간에 닫아버리셨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의 나이에 이삭을 주시고, 그의 가족과 부족이 점점 강성해지는 것을 보며 아비멜렉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혼자 오지 않고 군대 장관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한계: 나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비멜렉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셔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대단한 안목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함께하시는 것을 바라볼 있었던 자체가 아비멜렉에게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있는 은혜였던 셈이죠.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아비멜렉의 가장 문제는 거기서 멈췄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브라함을 돕고 형통하게 하는 하나님은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찬양대에서 불렀던 '엘리야의 하나님'이라는 곡을 기억하시나요? 갈멜산 제단 위에 불로 응답하신 엘리야의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마지막에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가사가 나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은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 하나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고, 기적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구나"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비멜렉의 이야기에서 시선을 돌려,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가 사건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나아갔는지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깨달음: 나는 누구인가

왜냐하면 사건은 아브라함에게도 굉장히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는 블레셋 지방에서 지금 유리하고 방황하며 양과 소를 먹이는 유목민, 아직 민족도 아닌 유목민의 족장이었습니다. 사람 수로 보면 많아도 명은 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500 정도 되었을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를 쳐들어왔던 북방 민족과 싸울 명을 데리고 갔는지 기억하시죠?

 

318. 그것이 아마 안에 있던 종들과 훈련시켰던 모든 사람들의 숫자였을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은 가족까지 합쳐서 500 정도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있습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리 많지 않은 수였을 겁니다. 작은 부족을 이루며 계속해서 움직였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곳에 머문 적이 거의 없었고, 계속 이동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상황에서 들려온 고백

그런데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습니다. 우물을 팠다는 것은 이제 그가 여기서 정착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우물이 7개나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그냥 두지 않고 우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곳은 우리 땅이니 나가라" 경고였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우디 건설 붐이 불었을 사우디에 다녀온 분에게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차를 타고 가다 길가에 주차를 했는데, 뒤에서 차가 그냥 들이받고는 자기 차를 밀어버리더니 자리에 떡하니 주차를 하더랍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가서 따지자, 사우디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여기 있어? 여기 우리 땅인데 나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말이 없더랍니다.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똑같이 행동한 겁니다. " 우리 땅에 우물을 팠어? 나가! 이건 우리 거야!"라고 말이죠. 아브라함에게는 사실상 '나가라'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상황에 있을 , 아비멜렉이 찾아온 겁니다. 이것이 원래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아비멜렉이 사건을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몰랐다" 하지만, 말이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건이 벌어진 아비멜렉이 와서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신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말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지금 그는 정착하려던 곳에서 우물을 모두 빼앗기고 쫓겨날 판입니다. 아무것도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그의 인생을 향해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더라"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충격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우리만 모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모든 인생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셨던가?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정처 없이 가야 상황인데, 나의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진실을 따져봅시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너와 항상 함께하셨다"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착하려던 땅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느 말이 맞는 말인가요? 아브라함의 심정은 배제하고, 사실만 놓고 보면 아비멜렉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말이 맞다면, 이것은 이런 상황이 것과 같습니다. 월세를 집에서 쫓겨나게 세입자에게 어느 집주인이 찾아와 사과를 하는 겁니다. "제가 계속 월세를 재촉해서 미안합니다. 밀린 월세는 누군가 냈으니 여기서 계속 살아도 좋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장 놀라겠습니까? 월세를 없는 세입자가 가장 놀라겠죠.

 

신자가 바로 놀라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고 살아가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나요? 고속도로에서 차들이 뒤집어졌는데 차만 깨끗할 ,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하고 말합니다. 1 365 364 동안 사고 없이 다녔던 시간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기적이고, 무엇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인지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지금 귀한 시간에 옷을 챙겨 입고 마스크까지 써가며 예배에 와서 앉아 있는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오늘도 예배에 참석했다'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자체도 놀라운 일이고,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하나님,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같고, 모든 것을 빼앗긴 같은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이 "너는 모든 것을 가진 "라고 말해주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기막힌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가 가장 모릅니다.

 

여러분, 저도 그랬던 같아요. 제가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친구들은 거의 예수 믿는 친구들이었습니다.하지만 가끔 믿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거든요.

 

친구들과 함께 있을 교회 때문에 너무 고민이 됐습니다. '교회가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었죠. 제가 다니던 교회가 개척교회였는데, 부모님이 개척 멤버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듣기 싫어도 매일 집에서 듣게 됐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이 자녀들 앞에서 교회 이야기를 많이 하는 좋지 않을 때도 있는 같아요. "목사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나이에 '내가 신앙을 계속 가져야 하나? 예수를 믿는다는 뭔가?'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예수 믿는 친구들한테는 얘기할 없었죠.

 

그래서 밖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대학 시절이었네요. 파는 집인 '녹두집'이라는 곳이었는데, 순댓국을 시켜놓고 앉아서 친구는 소주를 마시고 저는 콜라를 마시면서 교회 한탄을 했습니다. 믿지 않는 친구에게 말이죠. "목사님이라는 분이 글쎄 이렇게 이렇게 하더라. 그런데 교회 집사님들은 밤에 몰래 와서 이러더라. 내가 들은 얘기인데 속상하다" 얘기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한테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 승윤아, 그러지 말고 하나님한테 기도를 한번 해보면 어때?"

 

저만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면 들으신다는 친구는 오히려 알고 있는데, 정작 나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언제든지 의지할 있는 분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나만 까맣게 잊은 모든 짐을 혼자 지고 고생하면서 고통을 당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일인 같습니다. 의지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데, 엉뚱한 곳에서 울고 계십니까? 되신 주님께서 이렇게 환하게 비추시는 대낮에 손전등을 들고 길을 찾으려고 하십니까? " 이렇게 어둡지? 손전등이 잘못됐나 , 건전지를 갈아야겠다" 하며 투덜대고 계시진 않나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여러분을 비추며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책임지시고 사는 날까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정말 아브라함의 폐부를 찌르고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자신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인생

아까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만 잊어버린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아브라함만 잊고 있던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아비멜렉이 지적합니다. 아비멜렉은 "나와 자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거짓을 행했습니까? 바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을 때입니다. 아비멜렉은 일을 다시 언급합니다.

 

아비멜렉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브라함 뒤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그의 집안의 태가 닫혔다가 열렸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가 다시 우리에게 거짓되이 행하면, 네가 무서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집안을 어떻게 하실지 모른다. 우리는 끝장난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을 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거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방법을 찾았던 아브라함에게 이보다 뼈아픈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을 듣고 뜨끔한 정도가 아니라 창피했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재벌이 롤스로이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쭈쭈바가 먹고 싶어져서, 부끄럽다고 홈리스 옷을 바꿔 입고 그들 사이에 줄을 서서 쭈쭈바를 얻어 먹고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재벌은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죠.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라고 하거나 사면 되는 것을, 굳이 옷까지 바꿔 입고 가서 얻어 먹으며 좋아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가요? 지금 제가 여러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인생을 허락하셨으며, 얼마나 놀라운 영광을 누리고 있는지를 모른 , 쭈쭈바 하나 얻으려고 홈리스 줄에 서는 것과 같은 삶을 당연한 것처럼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어떤 복이 허락되었는지 깨닫고 정신을 차립니다. 그는 이삭을 얻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고 그를 사랑하시는지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났을 ,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참고 사랑하고 계신가조차 이제야 알게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땅의 진정한 주인은 아비멜렉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제 아비멜렉에게 담대하게 말할 있게 됩니다. 우물을 돌려달라고, 마치 자신의 땅인 것처럼 말이죠. 그는 남의 땅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는 가나안 땅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분명히 말했듯이, 그는 단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단순히 그곳으로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자 영광스러운 기업으로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 속에는 그를 구원할 진정한 메시아가 있었고, 그가 잊고 있었던 진정한 유업이 무엇인지 알게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에셀나무를 심습니다. 에셀나무는 20m까지 자랄 있는 상당히 나무입니다. 여러분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린 아브라함을 자주 보셨을 텐데, 상수리나무는 이미 굉장히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은 에셀나무를 심고 옆에 제단을 세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제 나무가 자랄 때까지 여기 있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심음으로써, 나무가 크게 자랄 20년이든 30년이든 그곳에 터를 잡고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이 발견한 우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에 정착하게 하신 것이며, 이제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때는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영원하다' 말은 단순히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영원' 모든 시간 속에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1초도, 한순간도 아브라함을 홀로 두지 않고 함께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고백은 하나님이 모든 시간 중에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와 함께하셨고, 함께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됩니다. 우리가 찬송가에서 가끔 '지금도 살아계셔서'라는 말을 쓰지만, '지금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모든 인생 속에서 1초도 그를 홀로 두지 않고 함께하셨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그의 생명이 되는 하나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으며,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던 바로 하나님. 약속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인생을 완성해 가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의지하지 못하며 불안해할 때조차도, 오히려 모든 것을 가졌던 왕을 두렵게 만드셨던 바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이제 아브라함도 알게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나안 땅을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홈리스'라고 생각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진정한 홈리스는 오히려 애굽 바로나 아비멜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한 하나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인생

아브라함은 5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를 옮겨 다니며 천막 생활을 하던 족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왕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멀리서 찾아와서 자신과 자신의 자손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군대 장관까지 대동하고 와서 약속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이며, 가나안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자신은 땅을 조금이라도 얻어 살기 위해 부탁해야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땅의 주인이라고 여겼던 아비멜렉이 와서 자신에게 약속을 해달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 이상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

아브라함은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남과 비교하거나, 자기를 스스로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과거, 약점, 그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모든 순간들조차도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것이죠. 이전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나를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자신의 인생의 모든 흑역사를 지키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메시아를 품고 사는 인생, 죽음이 이기지 못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아브라함은 드디어 알게 것입니다.

 

우리의 흑역사, 하나님의 역사

여러분과 저에게도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부분이나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순간들이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상 자기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인생의 모든 흑역사를 지키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메시아를 품고 살게 인생, 죽음이 이기지 못하는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아브라함은 이제 드디어 알게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모두 흑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끔은 잠자다가도 생각이 나서 얼굴이 붉어지는 일도 있을 있고, 자다가도 소스라쳐 놀라는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기억을 빼놓고 인생을 기억하고 싶은 분도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 인생의 흑역사'라고 생각하는 인생조차도, 여러분이 변호하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거짓으로 만들어냈던 인생조차도, 모든 것이 무너질 같았던 순간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놀라운 말씀 앞에 서게 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직접 오신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지를 여러분은 더욱더 많이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쉬지 않고 나아가는 인생

아브라함이 불렀던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안에 이삭의 사건이 이미 담겨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에서 아는 것처럼,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한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 속에는, 이삭이 죽음에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이 이미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느 갑자기 영웅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것을 잃고 잊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속에서 베푸시는 일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 자체를 배워갔습니다. 살아가면서 새로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이미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인생을 이제야 깨달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과거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사람이라고 선포하셨기에, 이제 여러분은 새로운 나를 깨닫고 배워가는 사람이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며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갑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로 인해 아브라함처럼 쉬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아무리 느려 보여도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달팽이와 같은 믿음의 여정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을 적이 있습니다. "방주에는 달팽이도 들어갔을 것이다. 달팽이는 쉬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주에 들어갈 있었다." 달팽이는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기에 쉬지 않습니다. 그는 돌아서지 않습니다. 아무리 느려 보이고 보이지 않는 같아도 포기할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보배와 같은 인생이 바로 여러분의 참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팽이 이야기에 가지를 더하고 싶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달팽이가 쉬지도 포기하지도 않았기에 방주에 들어갈 있었다고 했지만, 저는 달팽이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생 여정 끝내어 방주 안에 배에 이를 , 아버지를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여러분과 저는 정말 보잘것없을지 모릅니다. 걸어가는 속도, 가는 속도는 말할 없이 느리고, 우리 자신을 달팽이보다도 미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의 인생의 여정이 끝날 여러분은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생 예수께서 인도하셨는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은 빛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내가 얼마나 빛낼 것인가라고 여러분이 자신을 빛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은 빛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이제 이상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게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남과 비교하거나,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약점, 모든 어두운 흑역사조차도 자신을 침몰시킬 없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저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보셨으니, 이제 저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래서 힘을 얻게 하시고, 부끄러운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