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67-롯 (5)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9장 37절과 38절 말씀입니다.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아멘.
세상적인 도리,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
오늘 저희가 다룰 본문은 실질적으로 창세기 19장 30절부터 3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에 따르면, 성경에는 설교를 하지 않아야 하는 본문들이 있는데, 이 본문이 그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자손을 낳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며, 사실 세상적으로 보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을 성경이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이 얼마나 정직한 책인지를 알려주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롯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이 본문을 다루면서, 의인이라고 불렸던 롯의 인생에 왜 이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일들이 오늘날 신자이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을 다시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 롯은 그 가족과 함께 소돔을 떠나 소알이라는 곳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소알을 남겨둘 테니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롯은 산으로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소알을 피난처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그곳에서 살지 않고 소알을 떠납니다. 소알은 작은 소돔과 같은 곳이었고, 깨끗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곳이 아니었으며,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롯을 위해 그 도시를 멸망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에, 롯은 소알로 도망갔던 것입니다.
그곳에 간 롯의 가족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변의 네 개의 큰 도시가 모두 유황과 불로 타버려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롯의 가족만 살아 소알로 들어갔습니다. 성경은 소알 사람들의 생각을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롯은 소알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성경은 그가 '두려워서' 그곳을 나왔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소알이 소돔처럼 죄가 많은 곳이기에 그곳에서 사는 것이 괴로워서 경건한 삶을 살려고 나온 것일까요? 롯의 이후 이야기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소알도 소돔처럼 멸망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싶었고, 소알도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두려움 때문에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소알을 떠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롯을 위해 소알을 남겨주셨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롯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곳을 뛰쳐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처음부터 순종한 것도 아니었고, 그의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
이 구절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30절 바로 앞에 있는 29절입니다. 29절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롯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 모든 구원의 진정한 원인이 되는 것이고, 롯은 마땅히 아브라함이 있는 곳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알을 나오면서도 아브라함이 있는 곳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산으로 올라가 동굴에 거하게 됩니다. 학자들은 그 산이 모압산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은 롯의 결정은 그에게 안식이나 안전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소돔으로부터 목숨은 구했지만, 그의 나머지 삶을 보면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결국 그는 목숨은 구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삶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구원을 받았으나 '너무나 가난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풀과 지푸라기의 공적, 그리고 자기 교만
성경에 그런 부분이 나오죠. 고린도전서 3장 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한 말입니다. 이 구절만 들으면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별로 한 일이 없어 하나님의 불에 공적이 다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각자 자신의 공력으로 집을 짓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어떤 이는 금과 은으로, 어떤 이는 풀과 지푸라기로 짓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위에 불을 임하게 하시면 어떤 것은 다 타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풀과 지푸라기는 타버리고, 금과 은은 불에 타지 않으니, 금과 은처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명확하게 해석하려면, 여기서 말하는 금과 은, 그리고 풀과 지푸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린도전서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좋은 자
그 문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기도를 열심히 하며, 하나님의 은사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에 힘을 다했지만,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공력이 불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은사가 충만했지만,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자신을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 구절은 '교만하다고 느끼지 않는 모든 사람은 교만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은 양심에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는 **"믿음이 강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금과 은으로 공적을 쌓는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강할 수는 있었지만, 믿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높은 자리에 두었습니다. "나는 저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더 기도하고 깨끗하게 살고 있다", "나는 주님을 따라 살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 그들과는 조금 다르다"라는 생각을 우리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 함정에 가장 많이 빠지는 사람은 목사일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오래 한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게 되고, 이는 파당을 만들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파, 심지어 예수파까지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믿음으로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타서 없어질 것들을 자신의 자랑과 하나님께 인정받을 공적으로 삼았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겨우 구원만을 받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구원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매일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똑같은 삶을 살았기에 믿음으로 사는 기쁨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인정을 좇는 삶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며, 하늘나라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시겠다는 사실을 깨닫거나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남이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인정을 받는지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자신을 인정해주면 기뻐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면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정하고 계시는지는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안식이 그에게는 따르지 않습니다. 괜찮은 일이 생기면 잠시 기뻐하고 마음이 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오는,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처럼 성도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날까봐 걱정하는 인생을 산다면, 이는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
기독교는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여러 특징이 있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인 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해서 섬긴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의 눈치를 보고, 신이 무엇을 좋아할지, 무엇을 바쳐야 할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신화 속 신들은 인간이 시끄럽게 굴면 멸망시키겠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신의 기분을 맞추려 합니다.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면 이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성을 들이고 치성을 바치며, 그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강력하게 말했듯이, **"하나님이 너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살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탄식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나와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은 채, 세상의 것들에 만족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내 직장이나 은행 잔고, 혹은 내가 누리는 많은 것들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우리는 **'나는 하나님 때문에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상을 부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팬데믹은 우리에게 이 질문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불안하고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두려움이 있습니까?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 권력, 모든 힘은 결국 나를 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취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에 일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결국 나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이라는 우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나 신앙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삶과 싸우고 그 우상을 부러뜨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실력, 경력, 자녀와 같은 자랑거리들을 우상으로 여겨 부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깨뜨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상을 깨뜨린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오지 않으면, 우상을 깨뜨리고 나서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자기 우상으로 돌아간 사람은 결코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친절한 품과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질 수 없습니다. 우상을 부수고 욕심을 버린 후에 자신에게로 돌아가면,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방황을 겪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기에 우상이 아닌 주님을 섬기겠다고 말해놓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더 큰 혼란을 초래하는 모순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올 거야. 그날에는 하늘도 떠나가고, 물도, 모든 물질들도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모든 일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질 때, 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마땅하겠느냐?"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심판과 방황, 고난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 자, 십자가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는 자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하셨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내 삶이 변할 수밖에 없고, 주님을 더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 그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자입니다. 내가 더 많이 알아서도, 더 잘나서도, 기도를 더 잘해서도, 남보다 신앙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인정에 연연하십니까? 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우리의 눈은 벗어나지 못합니까? 그 때문에 낭비한 아까운 세월과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산다"고 말하면서도 벌써 눈치를 보고 있지는 않나요? "다른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라고 말하고는 "근데 그 사람 뭐라고 그래?"라고 묻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누군가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쿨하게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말에 의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도리를 좇아간 롯의 딸들
만일 여러분이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처럼 가난한 믿음과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롯과 그의 두 딸이 직면했던 것처럼, 더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큰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으니, 이제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자손을 우리가 낳아 그것을 잇게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혹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여 남자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소알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바로 지척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 단어는 바로 **'세상의 도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세상의 도리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가 뒤틀려버린 이유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기대는 대신, 자신들의 후손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세상이었기에, 그것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롯은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통해 이 딸들이 무엇을 선언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압'**은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으로, '아버지로부터 얻었다'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벤암미'**는 '친족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두 이름은 자신들이 한 일이 당연하고 담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심각한 죄악을 겪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도리를 좇았고, 세상을 좇아갔습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웃과 교회 안에서 바른 말씀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단순히 '교회 열심히 다녀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왜 교회에 가야 하는지, 왜 예배가 필요한지, 왜 우리가 함께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예배에 오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올바른 신앙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 구속의 역사 속에서
이 두 민족, 모압과 암몬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형제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처음부터 이랬을까요? 아닙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두 가지 상반된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기 모세는 암몬과 모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압에게 땅을 주셨으니, 롯의 자손이기에 그들과 싸우거나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을 구원하시고 그 후손들에게까지 자상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암몬 자손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명기 2장에 나오는 이 말씀과 달리, 신명기 23장에는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왜일까요? 바로 발락과 발람의 사건 때문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유혹하고 시험에 빠지게 해 2만 4천 명이 죽었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를 복으로 바꾸셨지만, 모압과 암몬 자손에게는 더 이상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약 이 구절이 모압과 암몬의 이야기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보아라, 롯을 구원하셨어도 결국 결말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압과 암몬 족속은 오늘날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룻
하지만 모압 가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기근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나 도망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시어머니의 아들들이 모두 죽고, 여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말합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룻을 통해 오벳이 태어나고, 오벳은 다윗의 조상이 되며, 다윗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세 명의 빛나는 여인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이 모압 여인 룻입니다. 발람과 발락의 사건조차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그 여인을 기억하시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 어떤 것도, 사탄도, 발람도, 발락도, 어떤 죄와 고민과 방황과 어려움도, 하나님께로 돌아온 그 여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
그리고 그 역사는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하루를 버티기 어려웠던 순간들, 암이나 우울로 고통받던 날들, 실패와 절망 속에서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한마디,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그 한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주님 나를 돌보소서'**라고 탄식했던 그 한마디를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족보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저는 여러분이 베드로가 말했던 이 구절을 기억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하라. 어떤 사람이어야 마땅하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인생조차 찢어졌어도, 끝까지 여러분을 붙들고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너는 어떻게 살겠느냐'**고 묻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여러분의 심장과 삶을 울리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에 참으로 귀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주님, 이 시간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술과 마음을 통해 주님을 부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내가 기억하여 누구도 멸망치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술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잊지 않고 부르게 하옵소서.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의 삶이 어떤 고통 속에 있든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나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고통 속에 있더라도, 주여, 나를 잊지 않으시는 주님을 부르오니, 주님 나를 생각하소서, 주님 우리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