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pchurch 2025. 7. 4. 04:54

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19 15절로부터 23 까지 입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아내와 딸을 이끌어내라.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사람들이 롯의 손과 아내의 손과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인자를 내게 베푸사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없나이다. 두렵건데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생명이 보존 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일에도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아멘.

 

롯의 망설임: 우리의 모습

창세기 19장에서 우리는 롯과 소돔, 고모라의 이야기를 통해 소돔의 죄악이 무엇이었고 롯이 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심판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동이 트자 천사들은 롯을 재촉하며 그의 아내와 딸을 이끌고 성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성의 죄악 가운데 함께 멸망할까 염려했던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롯의 반응입니다. 롯은 이미 그날 사위들에게 "어서 속히 이곳을 떠나라. 이곳은 멸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으나, 사위들은 이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천사들이 비슷한 말을 했을 , 롯의 반응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다릅니다. 16절은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부분을 독립된 문장으로 강조하여, 롯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는 망설였을까요? 소돔이 멸망하는 것을 알고 천사들이 그를 재촉하는데도 말이죠. 성경은 분명한 목적으로 오늘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이해되지 않는 롯의 망설임은 비단 롯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나가서 밖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도 롯은 밖보다 안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같습니다.  이전에 천사들이 그를 안으로 이끌어 들여 구원했던 경험 때문에, 그는 안에 머무는 것이 안전하다고 착각했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롯에게 안전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안일까요, 밖일까요? 이야기는 우리가 결과를 알기에 쉽게 판단할 있지만, 당시 롯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의 판단으로는 안이 나은 보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안에 있을 피할 곳도 있고, 안으로 들어가 숨으면 무슨 일이 있든지 살아남을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참된 안전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어디가 안전한 곳일까요? 성도에게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사업을 어려움에 처해 주님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자신의 사업이 어렵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치사하게 여기거나, 스스로 상황을 개선한 후에야 나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죄입니다. 마음에 상처와 어려움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께 가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믿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계기가 됩니다. 사업이 회복되고, 병이 낫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소위 말하는 '간증' 끝이라면, 사업 회복이나 나음, 혹은 마음의 평안 자체가 안전과 평안의 끝이라면, 여러분에게 안전한 곳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되는 사업, 건강한 , 마음의 갈등이 해소된 , 그리고 기쁨과 행복을 느낄 있는 순간이나 상태가 가장 안전한 곳이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평안이 여러분의 안전이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사업이 다시 힘들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든 인간은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 병에 걸립니다. 다시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또한 마음이 평안할 때도 있지만, 예배 시간 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갈등 속에서 힘들어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평정은 무너지고, 여러분은 안전하지도 안정적이지도 못한 상태가 됩니다. 정말 안이 안전하고 밖은 불안할까요? 소돔 안이 안전하고 밖은 안전하지 않을까요? 혹은 반대일까요?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번째 교훈을 줍니다.

 

치유의 진정한 목적: 하나님께로

우리는 요즘 치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음의 상처는 깊고 오래가며 고통스럽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겉으로는 이겨내는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조차 마음 깊은 곳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힐링'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치유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치유'라는 자체가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다시 평안해지고, 치료를 받으며, 평화롭거나 행복한 마음을 누리고, 과거의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는 것만이 치유의 목적이 되어야 할까요? 사실 치유의 진정한 목적은 치유 자체가 아닙니다. 치유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만약 마음의 평안이 우리의 목적이 된다면, 평안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를 붙잡아 것이 없어서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삶을 살게 것입니다. 치유의 목적은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세상이 있는 힐링이나 치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치유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여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와의 관계, 혹은 인생을 살아가며 겪었던 수많은 상처와 미움, 부모나 자녀와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힘들 , 함께 모여 아픔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소위 말하는 '치유' 느낍니다. 나만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새로운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다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치유의 과정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치유는 인생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갈 이루어집니다. 그곳에 진정한 영혼과 육신의 치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안과 밖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롯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고 함께 나가려 했던 바로 자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롯을 이끌어 내셨던 자리, 하나님이 롯과 함께 걸었던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안전한 곳이었고, 어떤 곳보다도 가장 치유가 일어났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롯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동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인해 안전했던 자리가 바로 성도의 안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들에 자주 현혹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하면 우리가 안전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다음의 비유와 같습니다.

 

'노란 연필' 신앙의 함정

어릴 시대에는 한국산 동아 연필이 있었죠. 학교에서는 주로 HB 심을 썼는데, 당시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탓인지 연필심이 튼튼하지 못해 부러졌습니다. 연필 부러뜨리기 놀이를 해도 동아 연필로는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모든 것을 석권했던 연필이 바로 노란색 미제 연필이었습니다. 지금도 미국 사람들이 쓰는 연필 말이죠. 연필만 나타나면 모든 경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노란 연필이 최고였죠.

 

, 만약 이런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동아 연필로 시험을 때마다 10, 15, 30, 40 이렇게 낮은 점수를 받다가, 어느 미국산 노란 연필로 시험을 쳤는데 100점을 맞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아이가 집에 와서 엄마에게 "엄마, 이제 연필 사줄 노란 연필만 사줘! 노란 연필로 시험을 쳤더니 100점이야. 앞으로 노란 연필만 거야!"라고 말한다면, 어머니가 정말 "그래, 네가 노란 연필로 쓰면 100점이구나" 하고 노란 연필만 사줘야 할까요? 여러분은 모두 아실 겁니다. 그날 아이가 아마 공부를 열심히 했겠죠. 그래서 노란 연필이 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아이가 만약 연필에 이름을 새기고 리본을 달아주고 꽃으로 장식하고 스티커를 붙이며 ' 노란 연필이 최고다'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실망하게 것이고 부모님은 속상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과 저는 너무나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제가 이와 비슷한 일을 자주 합니다. 기도를 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에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이렇게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다" 말이죠. 심지어 "당신이 만약 철야 기도를 했다면 문제가 해결됐을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분이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노란 연필' 바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어라, 열심히 교회 와서 봉사를 하느냐? 나는 그렇게 했더니 사업이 다시 나아지고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당신도 사업 문제로 사업에 매달리지 말고 교회에 와서 봉사해 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사업을 회복시켜주실 거야"라고 자신의 경험을 말해줍니다. 바로 그것이 '노란 연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면 이렇게 된다" 경험을 이길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경험한 것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원리'들이 우리에게 새로 생겨나고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새로운 율법이 되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가느냐 하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회에 선행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 이름 내지 마세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죠." 그래서 무명으로 하려 합니다. 좋은 태도입니다.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무명으로 선행을 자신이 굉장히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남들처럼 이름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일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하라" 가르쳐주시면, 많은 분들은 그런 기도를 골방에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골방에서 하는 기도가 여러분에게 다른 율법이 된다면, 그것은 이전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나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결국 진짜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고 우리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 신앙, 다른 '노란 연필' 되지 않으려면

개혁 신앙은 제게 너무나 소중한 신앙의 유산이자, 우리가 함께 신앙을 고백했던 수많은 종교 개혁의 유산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선조들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나는 저들보다 이러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다르다' 생각한다면, 여러분과 저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바른 신앙' 여러분의 속에 겸손과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러분이 알게 다른 무엇이 되어 신앙 자체를 움직이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예전의 나쁜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을 뿐입니다. 기복 신앙을 다른 교만함으로 바꾼 것이죠.

 

여러분은 어쩌면 '나는 이제 교육 수준도 높고 교양도 있으니, 옛날 시장 바닥에서 그저 그렇게 싸우며 믿는 무식한 신앙은 버리겠다' 생각하며, 가장 교양스럽고 멋있어 보이며 경건해 보이는 다른 거짓에 빠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진정으로 앞서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다른 '노란 연필'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여러분을 반드시 아프게 하고 엉뚱한 길로 끌고 가게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진정한 '공부' 해야 하는데도, 다른 '노란 연필' 붙들고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란 연필' 여러분에게 진정한 답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저는 신앙의 진정한 본질에 다가가야 합니다. 본질을 돕는 것이라면 우리 신앙의 많은 선배들이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자체가 여러분에게 다른 '노란 연필' 되어서는 됩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와 태도는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연보와 십일조: '노란 연필' 아닌가?

여러분, 연보나 십일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많은 분들이 십일조에 그토록 열심을 내는 이유는 수많은 간증을 들었고, 그것이 성경에서 명령하는 것이라고 굳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십일조를 번도 빼놓지 않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일에 축복을 주셨다" 간증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분들에게는 그것이 충분히 경험된 사실이겠죠.

 

그래서 우리도 갤럽 조사를 해봐야 같아요.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모든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열심히 하는가? 그렇게 했더니 어떻게 됐는가?" 하고 적어보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놀랄 것입니다. 통계를 보면 한국의 부자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을까요, 불교인이 많을까요, 아니면 비종교인이나 무신론자가 많을까요? 아마 통계를 보면 놀랄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이렇게 복을 적게 받았을까?"라고 말이죠.

 

여러분, 진짜 문제는 통계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의 **'노란 연필'**이라고 믿고 그것을 붙잡고 있는 우리들이 진짜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서워서 섬기는 거예요. 방법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고 섬기는 거죠. 아니요, 그래서 하나님을 번도 사랑해 보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손해입니다. 천국에 가느냐, 구원을 받느냐 하는 것보다 땅에 사는 동안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릴 있는 가슴 벅찬 감격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을 제대로 번도 느껴보지 못하고 " 노란 연필을 쓰느냐?", "너는 지우개가 빨간색이냐?", "너는 연필을 깎았느냐?" 이런 것들로 매일 싸우다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아픈 일이고 얼마나 가난한 삶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나눴던 사랑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일기장에 거의 없고, 그저 매일 '내가 오늘도 어떻게 하면 율법을 지켰는가',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만큼 순종하려고 애썼다' 내용으로 일기장이 가득 있다면, 저는 차라리 "하나님, 오늘도 쓰러지고 넘어지고 저는 상처투성이인데, 나는 이렇게 몸을 누일 있고 있는 아버지가 계셔서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진짜 좋은 신앙이겠습니까?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내가 얼마큼 잘한 신앙입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롯의 딜레마: '그래도 소돔이다'

롯이 멸망을 몰랐겠습니까? 소돔에 있으면 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소돔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압니다. 세상이 다가 아니고, 돈이 다가 아니고, 건강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런데 다는 아니지만, 롯에게는 '그래도 소돔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운 가장 심오한 지식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그래도 돈이다'**입니다. 가장 심오해요. 왜냐하면 이것을 이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 쨉도 됩니다. 신앙, 여러분 어디서 무너지세요?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돈인 겁니다.

 

롯에게 소돔은 전부가 아닙니다. 롯을 너무 쉽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는 성경에서 '의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소돔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소돔이다.'

 

여러분, 기억해 주십시오. 아무리 안전해 보이는 곳이 여러분 눈앞에 있어 보여도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여러분을 막아주고 살려주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아닙니다. 안과 , 안과 밖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세상이 해하지 않도록 여러분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바로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안전한 것입니다.

 

롯의 망설임: 보물과 마음이 있는

번째로 롯의 문제가 그가 어디서 안전함을 느끼느냐에 있었다면, 이는 자연스럽게 번째 이유로 넘어갑니다. 그는 망설였을까요? 소돔에 그의 모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에게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소돔에 있었습니다. 그의 모든 재산이 소돔에 있었고, 그를 만들어주었던 그의 이름이 소돔에 있었습니다. 그의 명예가 있었고,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소돔에 있었습니다. 그의 시간이 소돔의 것이었으며, 그의 소유가 소돔에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의 모든 보물이 소돔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제가 주님의 말씀을 읽어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번이나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마지막에 뭐라고 끝납니까? "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느니라."

 

어릴 저는 부흥회 설교를 듣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나름대로 해석했어요. 강사 목사님은 그런 의도가 아니셨겠지만, 저는 ', 헌금을 열심히 하고 가장 귀한 것을 교회에 가져다 바치는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거구나' 하고 느꼈죠. 그래서 집회가 끝나고 돌아온 주일, 제게 가장 소중했던 보물들을 교회에 가져갔어요.

 

보물은 딱지 1,200장과 구슬(그때는 '다마'라고 불렀죠) 150개였어요. 주일학교에 다녀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출석부에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고 칸에 '오원', '십원' 하고 헌금 액수를 적던 모습이요. 저는 그날, 헌금 칸에 적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저의 '가장 귀한 보물'들을 하늘에 쌓기 위해 가져갔던 겁니다.

 

하늘에 쌓는 진정한 보물

여러분, 이제는 압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늘의 진정한 보물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땅에서 비록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번이라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생각하며, '내가 것이 아닌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까' 고민했던 시간들이 사실은 하늘에 쌓아둔 시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는 겁니다.

 

롯에게는 애석하게도 그의 20년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있었고 소돔이라는 악한 곳에서 살고 있던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이름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소돔에 보물을 쌓아두던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시간은 전부 소돔에 쌓은 보물이었고, 그의 재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에 와서 주일학교로부터 우리가 함께 편안하게 예배할 있는 건물, 그리고 교회의 많은 주변 환경과 모든 것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연보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물질이 없는 분들을 도울 있는 만큼 돕고, 교회에 필요한 만큼 자녀들을 위해 교육도 하고, 교회 유지를 위해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연보가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하늘에 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러 오는 겁니다. ' 봐달라'고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이렇게 헌금했으니까 나중에 모른 척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이죠. 얼마나 안타깝고 가난하고 슬픈 믿음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빠지기 쉬운 신앙생활입니까?

 

진정으로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은 오히려 이웃에게 베푸는 쓰이고, 여러분이 교회에 가져온 연보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나머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여러분이 어떻게 쓰느냐, 자녀와 가정을 위하여 어떻게 쓰고 있느냐, 그들을 위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며 그것 때문에 가정을 어떻게 돕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가, 이웃을 어떻게 돕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결국 여러분이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이름도 여러분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산다는 것을 여러분은 사실은 땅의 재물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이 되는 거죠.

 

롯의 간청: 재앙에 대한 두려움

롯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천사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 좋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산으로 올라가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소돔 옆에 있는 작은 성읍, 저기 있잖아요. 거기로 가게 주세요.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를 지은 곳이 아니니 거기서 살게 주십시오." 이것이 롯의 간절한 요청이었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어려웠던 거죠.

 

오늘 본문 1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인자를 내게 베푸사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여기서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재앙이 지금도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어서 나는 너무너무 무섭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롯이 그랬을까 생각하기 전에, 지금 롯이 누구의 손을 붙잡고 가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롯은 천사의 손을 붙잡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뭐라고 얘기한다고요? "저주가, 무서운 심판이, 재앙이 나를 지금 따라올까 , 그래서 내가 그것 때문에 죽을까 걱정합니다." 지금 하나님 손을 붙잡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 불안과 염려

여러분과 저에게 적용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가 저를 구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이렇게 예배에 참여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가 예배드립니다.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걱정과 근심을 달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오히려 무섭고 힘이 거죠.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에 평강과 평안이 없다면 그렇겠습니까? 불안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을 정말로 믿으시는데 불안하세요?

 

그러니 우리 솔직하게 고백합시다. 우리도 롯과 같다고 말입니다. "저도 따라오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요. 이것이 나를 삼킬까 걱정돼요. 노후가 걱정되고, 인생이 어떻게 될까 불안해요. 사업 때문에 불안하고, 하루하루 힘든 일들이 불안해요.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사하고 멋있지만, 그러나 주님, 나에게는 지금 이렇게 재앙이 따라붙고 있으니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 중간에 어디 없을까요?" 롯과 우리가 그렇게 다른 점이 있던가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 '헤메라' 의미

저는 롯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롯의 상황과 말씀이 기록된 것에 놀랐습니다.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싶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때문에 놀라고 답답했죠. 하지만 진짜 놀란 것은 사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놀란 건요. 소알로 가겠다고 했던 롯이 결국 소알로는 가고 산으로 가게 되는데, 소알로 가겠다는 롯을 향해 "그래, 네가 간다면 내가 소알까지도 구해 주겠다" 하시면서 손을 놓지 않고 가시는 하나님 때문에 진짜로 놀랐습니다.

 

여러분, 여기 우리 16절을 번만 보세요. 창세기 19 16절을 같이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사람들이 롯의 손과 아내의 손과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여기 느낌이 오시죠? 지금 천사가 롯의 손을 붙잡고 나가는 거예요. 롯이 지체하고 있으니까 손을 붙잡고 나가는 건데, 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자비'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성경에는 수없이 등장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구약에 번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맞는 말이 없어서 '자비'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영어에도 없는 히브리어에만 있는 단어예요. 외우고 싶다면 '헤메라'라고 외워도 좋습니다.

단어가 나오는데, 번째 사건에서는 감이 오지 않고 '하나님 자비하셨구나' 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번째 나오는 곳에서 의미를 조금 아실 있어요. 바로 이사야서 63 9절입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에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여기 나오는 '자비'라는 단어가 함께 쓰였는데, 단어가 아주 오묘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내용이죠. '구원'이라는 단어가 여러 나오지만, 앞의 구절과 뒤의 문장이 평행 구조를 이룹니다. 앞에서도 구원하시고 뒤의 문장에서도 구원하시는데, 앞의 것과 뒤의 것이 같은 의미를 표현하는 거예요. , '사랑과 자비'라는 단어가 '모든 환난에 동참하고 사자를 보내셨다' 것과 같은 의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비'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로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 그냥 두고 아니라, 너희가 겪고 있는 모든 환난에 내가 너와 함께했다' 것이 바로 '자비'라는 단어의 의미예요. , 롯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과 눈물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뒤의 구절도 마찬가지예요. '옛적 모든 날에' (여기에는 롯의 이야기도, 모세의 이야기도 들어 있겠죠. 누구도 빠지지 않을 겁니다)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이것이 바로 자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들어 안으셨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더라'

그런데 '안으셨으나' 중요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셨으나, 다음 구절에 뭐라고 나오냐면요,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 나옵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너희를 드시며 안으셨으나 너희가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는 거죠. 그리고 이사야 64 5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있으리이까?" 우리말로 하면 '벼룩도 낯짝이 있고 멸치도 창자가 있다' 말과 같아요.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있겠습니까?'라는 절규죠.

 

이어지는 구절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무릇 우리는 부정한 같아서 우리의 의는 더러운 같으며 우리는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말하는 이스라엘과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저도 구절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정말 너무 심하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그들의 의는 정말 더러운 같아서 우리는 더럽고 나도 죄인이라고 얘기하니 부정한 같구나. 잎사귀 같아서 잘려지면 시들시들해져서 아무 힘이 없구나. 맞아. 우리 모습이 그렇지'라고 생각하다가 마지막 구절에서 정말 놀랐습니다. "아무도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더라."

 

말을 생각해 보니 정말 하나님 앞에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분발해서 주님을 붙잡은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그때 처음으로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에 전기 충격을 받은 알았습니다. '나는 정말 스스로 분발해서 주님을 찾은 적이 없구나.' 저는 목사라서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매주 설교해야 하니까요. 기도를 해도 어려운 일이 생기고 힘들고 목회가 어려워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아무 일도 없는데 스스로 분발해서 주님께 나아가 "주님, 나는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나간 적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편안할 , 아무 일도 없는데 너무 주님이 좋아서, 너무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서 스스로 분발하여 주님께 적이 있으신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설마 있겠죠, 하지만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절을 읽는 순간에 정말 무릎이 꿇어진다는 말이 말이더라고요. 말이 없어서요. '정말 우리가 이것과 같구나.'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아버지십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 때문에 설교 준비할 너무 마음이 컸고, 일부 예배 때는 이것 때문에 울어서 설교가 됐는데요, 바로 구절입니다. **'그러나'** 시작해요. 이사야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그러나 여호와여, 내가 이렇게 더럽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않는데,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아버지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하세요? 여러분 이렇게 하실 있겠어요? 이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나는 정말 자신을 때는 주님, 자리에서 벼락 맞아 죽어도, 주님 자리에서 모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소돔의 불이 나에게 떨어져도 주님 말이 없는 정말 부정한 자요, 정말 더러운 옷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아버지십니다. 나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나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 번이나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이다."

 

여러분, 여러분을 그렇게 알게 되었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어서 정말 얼굴을 없는데, 말을 있는 사람을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다고 해도, 자식 아니라고 해도, 주님이 나를 ' 아니야, 집으로 나가!'라고 해도, 주는 나의 아버지십니다. 나는 주님께 가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더러운 옷밖에 입을 모르는 나를 보시옵소서. 나는 주의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기다림

그래서 주님이 소돔 근처를 배회할 수밖에 없는 롯에게 "롯아, 그래 그렇다면 내가 성도 구해 주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리로 속히 도망가라. 네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없으리라." 내가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던질 수도 없다. 모든 것을 멸망할 수도 없다. 세상을 심판할 수도 없다. ? 나에게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안전할 때까지, 네가 살아날 때까지, 네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웃으며 나를 즐거워하고, 나에게 만족할 때까지 내가 모든 것을 멈추며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의 딸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주님은 세상의 심판까지 유보하시면서 기다리시겠다는 아닙니까? 하나님을 여러분도 이렇게 불렀어야 하는 아닙니까?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시나이까!"

 

기도합시다.

주님, 소알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뿐 아니라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품만이 안전하오니, 여호와여, 주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를 돌아보시옵소서. 우리의 눈이 주님을 잠시라도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는 나의 아버지이시오니, 제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오리이까. 주님의 사랑이 주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붙잡아 주시고, 주님의 손길이 어느 곳에 있든지 여기 함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자녀라 고백하고 있는 자녀들을, 주님이시여, 사랑으로 덮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