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강해 설교집/창세기 강해

창세기-57-영원한 언약

lampchurch 2025. 6. 17. 06:56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7 9 절로부터 14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언약을 지키고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남자는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자를 막론하고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아멘.

 

13년의 공백과 '완전하라' 명령의 의미

저희는 지난주에 창세기 17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살폈습니다. 말씀은 “나는 샤다이,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주님의 선포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완전하라’는 명령은 “앞으로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살아라” 혹은 “어떤 죄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식의 부담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단어는 영어 성경의 blameless(흠이 없는)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단어는 ‘흠 없는 양’, ‘흠 없는 염소’처럼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개념을 로마서의 말씀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권면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자신을 세속적인 세상으로부터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브라함이 여전히 믿음의 위에서 자라나는 중이며,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계속해서 은혜의 자리로 이끌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내용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첫째는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 둘째는 가나안 땅이 그와 그의 자손이 영원히 거할 기업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너와 나의 언약’이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의 언약’**이라고 선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언약의 시작과 성취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시작하셨고, 그분이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우리의 순종

지점에서 우리는 신앙의 중대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실 테니, 내가 일은 거의 없겠구나.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루실 것이다. 어쩌면 내가 무언가 하려고 나서는 자체가 오히려 잘못일 있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성경의 언어를, 안타깝게도 ‘산수’의 언어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담긴 인격적인 깊이를 놓치고, 모든 것을 숫자처럼 계산하려 합니다.

 

제가 어릴 아이에게 산수를 가르치며 이런 문제를 적이 있습니다. “사과가 있는데, 아빠와 엄마와 네가 하나씩 먹으면 개가 남을까? 산수를 잘하는 아이라면 0개’라고 똑똑하게 답하겠지만, 감성이 뛰어난 아이는 다른 답을 내놓기도 합니다. “한 개요. “왜 하나가 남지?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지금 먹고, 숨겨 놨다가 나중에 먹을 거니까요. 듣고 보니 그럴듯한 정답입니다. 아이는 사과를 반만 먹고 반을 남겨둘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드리려는 말씀의 핵심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숫자나 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전능하심이 ‘나는 일이 없다’는 우리의 수동성으로 직결되지 않습니다. 단순 논리로는 그것이 맞는 같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가 펼쳐집니다.

 

오히려 성경의 논리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는 힘을 다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우리의 무력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순종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할례: 언약의 표징과 영적 원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할례’**라는 주제는, 인격적인 관계의 신비를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지금 벽이나 컴퓨터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계산하고 법적으로만 처리하는 존재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함께 우시고 아파하시며, 인격적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오늘 할례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기보다, 가지 핵심만 짚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가 반드시 마음에 두어야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맺은 언약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명령을 들으면 ‘그래, 약속이니까 열심히 지켜야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손의 번성과 가나안 땅이라는 기업, 가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있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언약을 어떻게 지킬 있을까요? 지금부터 땅을 모으고, 많은 아내를 얻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 언약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명령 안에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대단히 중요한 영적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질문을 마음에 품고, 할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지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할례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완전히 새로운 관습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노아 시대의 무지개 언약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무지개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던 무지개에 ‘언약의 증표’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할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존재하던 관습을 가져오셔서, 이제껏 세상에 없던 거룩하고 특별한 의미를 담아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할례: 고대 이집트의 풍습,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증표

할례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고대 이집트에서 6 , 기원전 4 년부터 행해졌던 풍습입니다. 이집트 벽화의 상형 문자를 통해서도 흔적을 확인할 있으며, 발굴을 통해 당시 청소년기 소년들이 단체로 할례를 받았음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성인식과 같아서 "이제부터 어른이 되었다" 의미를 가졌고, 결혼 직전에 행해진 할례에 대한 기록도 많이 발견됩니다.

 

할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혹자는 할례가 포피를 잘라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행위였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해석과 다르게, 아브라함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할례는 이전의 모든 할례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존재했던 할례라는 형태를 빌어 전혀 새로운 내용과 약속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난지 8 만에 행하는 할례는 찾아볼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할례는 성인에게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할례는 단순히 역사적인 배경이나 주변 문화에서 배운 것이 아님을 있습니다. 역사적, 고고학적으로도 이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할례에 대한 기록이나 증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할례는 이집트에서 크게 성행했던 것이므로, 아브라함은 할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언약 자체가 아닌, 언약의 증표로서의 할례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무지개처럼 기존의 것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할례를 언약 자체라고 말하기보다는, 언약의 증표라고 말합니다. , 할례는 언약의 내용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려운 책의 내용을 그림으로 만든 만화책처럼,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의 무지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지개의 히브리어 원어는 ''이라는 뜻입니다. 활을 세우면 공격을 의미하지만, 무지개는 활을 눕혀 놓은 형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그쳤다는 의미, 인간을 멸망시키려던 진노를 멈추시고 이제는 전쟁하지 않고 우리를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기억하라"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할례 또한 아브라함의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내용을 그림처럼 보여주며, 몸에 흔적을 남겨 그것을 때마다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무지개와는 다르게, 할례는 아브라함의 몸에 기록되었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첫째, " 후손을 번성하게 하고 가나안을 주며, 내가 너와 후손의 하나님이 것이다"라는 약속을 할례로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 인간의 죄성으로는 얻을 없는

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분이기에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여 인도하셨으니 당연한 말씀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손 번성 명령은 원래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의 명령이었지만, 인간은 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땅을 주겠다는 약속 역시 아담과 맺었던 약속이었으나,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모든 것이 깨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지(자손 번성과 ) 주시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해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었는데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검사는 판사를 향해 "이것은 공의가 시행된 것이 아니다(justice has not been served)"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었고 아래 태어난 아브라함도 당연히 자손이 번성할 없고 땅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까지 가고 집을 떠났으니 하나님이 당연히 주셔야 하는 아니냐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죄의 가장 무서운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착하게 살았고,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도 별로 없으니 하나님도 결국 나를 당연히 받아주시지 않겠느냐"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은 성경을 읽을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입니다.

 

남들과 비교하거나 스스로 생각할 "이만하면 아주 심하게 나쁘게 살진 않았는데, 그래도 괜찮은데?"라고 여기며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아주시리라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을 의지하고, 조상들을 의지하며, 자신을 위해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죄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항상 말합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을 동원해도,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어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모든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 너는 나에게 속하고 나는 너에게 속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운 것을 어디선가 만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없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 무엇인가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어릴 동네 구멍가게 유리창을 돌로 깨뜨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인아저씨에게 혼날까 한동안 가게를 피해 다녔죠. 그러다 어느 무심코 지나가다 아저씨와 마주쳤습니다. 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꼼짝없이 따라갔고, 맞거나 크게 혼날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겨울이었던 그날, 아저씨는 제가 가장 좋아했던 만두 호빵을 꺼내 주시며 ", 걱정하지 . 그런 가지고 남자 자식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아저씨가 '회개'라도 하신 건가, 아니면 '회심'이라도 하신 건가 싶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사실 아저씨가 저에게 그렇게 잘해 주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착한 일을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이미 깨진 유리창을 갈아 주시고 돈도 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행동이 있었기에 아저씨는 저에게 호빵을 주실 있었던 것입니다.

 

할례: 죄의 대가, 죽음의 상징

아브라함이 받을 자격이 없는 복을 받는다면, 무언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일이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의 내용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할례는 포피를 자른다는 의미인데, 이는 상징적으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당신이 지은 , 아브라함이 지은 ,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며, 죄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 할례의 번째 내용입니다. 죽지 않고는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죽음인데, 어떻게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일까요?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할례가 대신 죽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대신에 상징적으로 할례가 죽어 주는 것입니다. 몸의 일부분을 자름으로써 내가 죽었다고 여겨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이 될까요? "당신은 사형입니다!" 해놓고 손톱 하나 뽑고 나가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할례가 그것을 충분히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로새서 2 11)

 

할례가 상징하는 것이 단순히 포피를 자르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 몸을 잘라 죄가 없어지고 대신 죽었다는 말도 되는 이야기가, 그리스도께서 할례가 되셨다고 하면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으니, 너는 이제 너의 육의 몸을 벗는 것이고 죽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의 번째 내용은 죽음, 그것도 죄의 값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우리에게 대단한 증표를 남기는 같지만, 증표의 내용은 죽음입니다. ,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하늘나라의 영광과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죽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는 해결되지 않으니, 그리스도가 죽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복을 누리게 것입니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과의 단절

여러분은 공짜를 받아도 하나도 좋아하지 않을 분들 같아 보입니다. 지금 내가 죽을 자리에 대신 할례가 와서 죽었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이야기했는데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시는 같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죽을 , 여러분과 제가 당해야 죽음은 무서울까요? 죽음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의미라면, 훌륭하신 분들도 극복하는 문제입니다. "아이, 죽으면 피안이지. 죽은 다음에 그걸 걱정해서 . 지금 살아있는 중요하지." 하면서 넘기시는 분도 있고,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호흡이 끝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만의 말씀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가까운 모습이 여러분의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죽음에 가장 가까운 모습은 전쟁입니다.

 

죽음의 가장 가까운 모습을 제가 전쟁이라고 말할까요? 죽음의 진정한 정의는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든 자비와 긍휼과 선하심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죽는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과 완전한 결별을 하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지옥이라고 표현합니다.

 

지옥과 가장 가까운 것은 여러분과 제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도 있겠지만, 경험한 모습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인간이 바닥을 보이는 곳이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없고 자기의 목숨을 건져야 하며,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일을 당연한 듯이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생체 실험해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무더기로 아무 이유 없이 죽여도 오히려 사람들이 화를 내고 열을 내며 많이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보이지 않는 ,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래서 제가 제일 가깝다고 것입니다. 그것보다 비참한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나 혹은 땅에 살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지금 할례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음, 그리스도의 할례, 주님께서 죽으셨다.

 

우리의 할례가 아닌, 하나님의 개입

번째로,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할례로, 우리가 가진 것으로 모든 것을 이룰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브라함의 포피를 잘라서 그의 죄가 사라진다고요? 넌센스죠. 그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무슨 조폭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 잘라주면 " 이제부터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 줄게"라고 하실까요? 죄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의 육체적 능력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 그것을 우리는 할례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 이게 우리의 육체적인 능력이나 우리의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필요한 일이구나!" 이것을 할례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할례라는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단번에 죄의 문제를 해결할 있는 할례이고, 저주를 감당해야 되는 할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바로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할례: 효력 없는 방식

갈라디아서에서의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습니다. 이전에는 할례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미가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이제는 할례보다 영원한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할례나 무할례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은 능력이 아니고 내가 세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모든 것이 변화되는 깊은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평생 이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 능력이 아니구나,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항상 할례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한다고 표현합니다. 나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님으로만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내가 사는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알아갈수록 여러분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각자의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에게 오는 방식이 모두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살아가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같습니다. "나는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울도 여러분의 인생을 보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배설물과 같은 것이다."

 

나의 노력인가, 하나님의 은혜인가?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력을 가질 수도 있고, 노력해서 좋은 직장과 사업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조심해서 땅에서 건강하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노력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이런 것으로 제가 건강한 것도 아니고, 좋은 학교를 것도 아니고,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평안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말로는 그렇게 있지만 진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을 아직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깊이 알아갈수록 진심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 그렇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조차도, 내가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믿었던 ,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는 , 내가 그래도 이것으로 하나님 앞에 얼굴을 세웠고 다른 사람보다는 신앙을 조금 살았다고 얘기한 그것조차도 뿐이었구나." 이것을 성경 표현 그대로 진정으로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 정말 그렇구나. 나라는 존재가 누구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내가 만든 나의 광채도 아니고, 내가 지어준 나의 이름도 아니고, 내가 만든 자존감도 아니고, 내가 세워낸 나의 업적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름, 하나님이 주신 광채, 하나님이 주신 형상,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시는 이름, '나의 아들', '나의 ', '의로운 나의 자녀' 이것이 진짜 나의 이름이고 이것이 진짜 나의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고백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기쁨, 매일의 제자 훈련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나를 부인하기 시작합니다. 그전까지는 힘들죠. 여러분, 자기를 낮추는 일이 성경에 쓰여 있으니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고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라고 말씀하시지만, 말을 그렇게 자주 하게 될까요? 죽으니까! 그래서 그러는 아닙니까? 그런데 죽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죽으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깊이를 깨달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매일 여러분이 죽을 있도록 교육시키십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 여러분이 하는 , 직장 동료, 남편, 아내, 자녀, 내가 부딪히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께서 모든 순간들을 통해서 이걸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진짜 제자 훈련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도망을 많이 칩니까? 맞아들이기 싫어하고, 길로 가려고 하고, 그것을 가지고 속상해만 하고, 답답해만 하고, 어떨 원망만 하게 되잖아요. ", , 나에게?"라고 얘기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복을 차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복을 주시는데, 우리는 복을 차고 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편하고 내가 잘되고 남들보다 위에 서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낮아지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간극이 이렇게 큰데, 우리가 이것을 언제 알아갈까요? 매일매일 지금 여러분이 일을 하시기 위해 여기에도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번째입니다. , 능력이 아니고 그래서 내가 부인하는 것을 기쁘게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례의 자국을 보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메시아를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너의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메시아를 즐거워하라.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며 살았습니다.

 

난지 8: 죽음을 넘어선 생명

오늘 마지막 내용은 '난지 8'이라는 단어입니다. 훨씬 많은 의미가 있지만 오늘 마지막으로 다룰 것입니다. 죽음을 이야기하고 능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면서도, 난지 8일이라는 때문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대개 7일이 맞지 않습니까? 난지 7. 얼마나 완벽한 숫자입니까? 난지 7일이 되면 데리고 와서 성전에서 보이고 할례를 행하라.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8일입니다.

 

성경에서 8일은 항상 안식 첫날입니다. 무엇과 가장 관계가 깊을까요? 8이라는 숫자를 보시면, 그렇습니다. 부활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죽는 것이고, 잘라내는 것이고, 피를 보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난지 8 만에 할례를 행함으로써, 너희는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지막 것을 보면서 너무나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지으심을 받는 : 새로운 피조물

갈라디아서 6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는 ' 바로 창조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할례의 흔적을 알게 되면—그 흔적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히 나누겠지만—무엇을 아는 것일까요? 매일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흔적을 보면 ", 하루가 새로운 하루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날이 없습니다. 매일 새날입니다. 날을 내가 살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례의 흔적을 때마다 자신이 죽어야 자인데, 자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 할례를 받았을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삭을 낳고 이삭을 바치게 되었을 ,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이 **"그가 죽은 자를 도로 받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입니다. 그는 이삭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삭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의 내용을 인생 전체에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좌절하고 너무 답답해 하고 너무 성급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계획을 좇아서 우리들에게도 길을 함께 걷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길을 가게 됩니다.

 

할례에서 세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경은 할례를 이렇게 연결합니다. "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할례를 의미합니다—"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제가 앞서 읽어 드렸던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절에 가면 갑자기 할례가 세례로 바뀝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 이야기로부터 갑자기 세례를 받은 우리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세례도 할례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 죽은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 새롭게 창조했다는 말입니다.

 

죄를 끊어내는 십자가, 죄에 대하여 죽은 할례를 경험한 여러분은 죽음을 이기고 함께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참할례파'**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바로 진짜 할례파인 것입니다. "할례파는 싫어요. 세례파지 할례파 아닌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창세기를 하고 있으니, 할례는 아브라함이 받았지만 진짜 할례를 경험하고 진짜 할례를 이해하게 것은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과 참된 위로

그래서 여러분의 하루는 성령님으로 사는 것이 되고, 여러분의 위로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는데도, 쓰러진 같은데도, 힘들어서 "하나님, 오늘 하루는 없던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날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없는 고통의 하루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견디고 있다는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 때문에 날이 죽을 것이고, 그리스도 때문에 창조가 것이고,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아름다워질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내가 죽은 자가 아니라 자라는 것을 아는 데서 얻는 것이며, 여러분의 오늘 소망은 인생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내가 예수님과 몸이라는 사실일 뿐이고, 여러분의 염려는 오늘도 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여러분이 믿는 것은 자신도 세상도 어떤 것도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 샤다이입니다.

 

나의 깊은 고독 속에서도,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기에 힘든 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이름, 샤다이, 전능한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어제도 건지셨고 오늘도 건지시고 내일도 건지셔서, 이해조차 되지 않아 속이 뒤집히는 인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인생,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있는 인생으로 나를 여겨 주시며 만들어 가시는 그분과 살고 계시다는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진짜 할례파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님 앞에 왔사오니, 주님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성찬을 통하여 누리게 하사, 우리가 주님의 모든 능력 속에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신다는 주님과 함께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